손현숙 시인,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 수상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리토피아)

조송현 승인 2024.03.02 13:05 의견 0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 손현숙 시인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가 주최하고 계간 리토피아가 주관하는 제14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로 손현숙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 시집은 《멀어도 걷는 사람》(리토피아).

김구용시문학상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새로운 시에 대한 실험정신이 가득한 시인이 발간한 시집 중 엄정한 심사를 거쳐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시인 개인의 잠재적인 미래성 평가와 한국시단의 주역으로서의 가능성이 심사의 주요 기준이다.

손현숙 시인은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으로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 등을 냈고, 사진산문집으로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를 펴냈다. 연구서로 『발화의 힘』, 대학교재 『마음 치유와 시』 등이 있다. 문학박사인 손 시인은 현재 조병화문학과 상주작가로 근무하면서 대학에도 출강하고 있다.

고창수 시인은 선정평에서 ‘손현숙 시인은 광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꿈틀거리는 말을 끌어내어 연금술사들이 보았다는 그 노루를 보여주는 듯한 시를 지으며, 시간과 죽음에 갇힌 현존재로서의 손 시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현세적 경험을 통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의 깊은 동굴에서 진동하는 사물과 사건의 생생한 이미지들을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적으로 엮어내고 전개하는 놀라운 시적 상상력과 글쓰기 능력을 주목하게 한다.’고 말했다.

손현숙 시인은 수상소감을 통해 "부족한 사람의 시를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해주신 문예지 《리토피아》와 장종권 선생님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무릎이 꺾일 때마다 사랑과 격려로 손잡아 주신 고창수 선생님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손 시인은 "무엇보다 이 상은 단 한번도 빛난 적 없는 딸이었지만, 무조건 사랑해 주셨던 내 아버지와, 병상에서 힘겹게 삶을 버티고 계신 엄마가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 혹시, 지금 내게 소원이 있다면 엄마가 꽃 질 때 꽃처럼 돌아가셔서 꽃이 필 때 꽃으로 다시, 매년 돌아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손현숙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수상 시집은 《멀어도 걷는 사람》 중에서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 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 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 숲으로 돌아가야 이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모르겠는 여기, 눈빛으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파묘

제비꽃 보라무덤 색으로 붐빈다 무릎 꿇어 낮은 자세다 봉분 위에도 제단 아래도 서열이 없다 양지쪽에 발린 제비꽃은 이생의 기록, 보라가 짙다

죽음에 홀린 듯 여자는 꽃 앞에 앉았다 물은 뿌려 땅을 적시고 흙을 벌려 뿌리를 캔다 악착같이 흙을 쥐는 한 줌 힘 앞에서 숨 한 번 몰아쉬고 뿌리를 흙에 묻어 제자리로 돌린다

저도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것에 안간힘을 쓴 것인지 금세 꽃 이파리 시들하다 죄를 고하는 듯 뿌리를 털면서 손톱이 까매지도록 여자는 흙을 다진다

인연 깊어 가난한 인연 앞에 제비꽃으로 돌아온 여자, 저를 심다 말고 덩어리처럼 앉았다 난데없이 빗방울 뜬다 색이 연하고 입술 야들한 혼잣말은 저가 저를 모르고 낮은 자리 그때처럼 해거름이다

반음, 이상하고 아름다운

능소화 꽃둘레가 하늘 귀를 사르는 동안이었을 거다 아주 먼 데서 우레가 가는 길을 우레가 지나가고 머리 위로 뭉게구름 사소하게 다녀간 후, 푸른 잠에서 푸른 잠으로 날아가는 부전나비 한 쌍을 비스듬히 좇고 있었다 반백 년이 흐르고 나는 가난한 책장 한 장을 넘겼을 뿐인데, 낮별떼가 하늘 사닥다리를 타고 반짝거렸다 어느 틈에 아침이 오후 두 시를 사시斜視처럼 데려왔다 바람은 비에 젖어 능소화 꽃둘레 무지개를 타고 올랐다 물에 불은 꽃잎이 담장을 기어오른다 허공에 한 금 한 금 긋는 고양이 비음 사이로 그림자를 등진 사내가 어깨의 햇빛을 털면서 왔다, 갔다 그의 뒷덜미에서 목소리가 부풀었다 졸음처럼, 남서쪽에서 잠비가 올라오는 중이라 했다 오만 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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