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숙 시인의 '詩의 아고라'(123) 집시의 강, 신종호

손현숙 승인 2024.03.30 10:22 의견 0

집시의 강

신종호

새벽, 검은 바위에 앉아
새들의 울음으로 세수를 한다.
앞 강에 빠진 먼 산과
음표처럼 물벽 뚫고 튀어오르는
물고기들의 은빛 꼬리
귀 막고 멀리 들어보는
강 너머 마을 문 여는 소리
태양이 무릎 세우고
잠들었던 길이 기지개를 켜고
흰 개들 달려가는 강어귀에
듬성듬성 서성이는 물비린내
죽은 나무뿌리 훤히 보이는
여강驪江의 밑바닥에
자갈처럼 박혀 웃는 한 사람
취기로 한평생을 살았던
언덕길 노새, 마지막 등짐 부리고
이제 저 편 물길로 흘러가는 분
바람도 없는 날인데
옛집 마구간 문에 걸려있는
녹슨 말방울이
혼자 힘으로 구슬피 울며
만장挽章 따라 함께 간다.
집시처럼,

신종호 시인

시집 《해부되는 정신의 과잉》(북인, 2024)을 읽었다.

누가 몸을 벗어 경계를 지운 모양이다. 애틋하면서도 담담한 시인의 진혼곡은 죽음을 새롭게 상기시킨다. 뭐랄까..., 그것은 마치 오랜 미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세상의 첫 문장 같다. 화자는 “취기로 한평생을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회한을 깊은 시선으로 애도한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새벽, 아버지 가시는 길을 화해로 배웅한다. 죽은 자의 주검이 패배가 아닌 자유이기를. “앞 강에 빠진 먼 산”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죽음도 삶처럼 움직인다. 신종호가 젊은 날, 온몸으로 외쳤던 아름다운 자유민주주의처럼.

손현숙 시인

◇손현숙 시인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일부의 사생활》《경계의 도시》(공저) 《언어의 모색》(공저)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댕댕아, 꽃길만 걷자』
▷연구서『발화의 힘』, 대학교재『마음 치유와 시』▷고려대 일반대학원 문학박사(고려대, 한서대 출강)
▷현 조병화문학관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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