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용을 낚는 사람들 - 박태일

박태일 승인 2024.04.05 11:26 | 최종 수정 2024.04.08 16:51 의견 0
[픽사베이]

용을 낚는 사람들

박태일

백두산 처음 일어선 뜻은

세상 네 모서리가 처진 까닭

옥황상제 그걸 들어 올리려 동쪽에는 백두산을 세웠다는데

기상 높고 자태 예쁘고

아침 해 맨 먼저 떠오르는 곳

사방 오천 리 강토가 백두산 지맥으로 이루어지고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크작은 물골 모두 천지 땅 밑으로 잇닿았다는데

하늘 열린 뒤 하늘에 살게 된 선녀들

무지개다리 타고 천지 물에 오내리며 고와져

열두 봉우리 백두산 천지 용하단 소문 하늘나라에 퍼졌는데

하늘나라 옥황상제 막내딸 천지물에 내려왔다

씩씩하고 슬기로운 백두산 총각에 마음 두고 혼인 살림 차렸는데

아들에 딸에 손자가

손손으로 이응을 엮고 길을 닦아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또 두만강 기슭으로 벋었다는데

룡드레

화룡

이룡산

용자가 많은 것은 논농사 벼농사 탓

개산툰도 천평 들

상천평 중천평 하천평

곳곳에 샘이 있으나

하천평 샘이 그 가운데 으뜸

심술 사나운 흑룡이 검은 구름 타고 동서로 번쩍 남북으로 벌떡

불칼을 휘둘러 이저 골 물곬을 다 지져 막은 탓에

가물이 들어도 왕가물

마을 사람들 이 걱정 저 걱정 실타랜 듯 감고 있는데

영험한 공주가 나타나 흑룡을 이기려면

백두산 옥장천 샘물 마셔야 힘을 얻을 거라 도움주어

공주와 함께 우죽뿌죽 백두산에 오른 백 장사

옥장천 물을 사흘 마시고 힘이 백 배 천 배

마을로 돌아와 물곬 파는데

한 삽에 산이 하나 두 삽에 산이 둘

흙을 던질 때마다 우뚝우뚝

두만강 첫 동네 물줄기를 찾았단 소식

동해에서 용왕 딸과 희롱하던 흑룡이 듣고 부아가 나

부랴부랴 검은 구름 잡아 타고 돌아와 뛰어들자

백 장사 흰 구름 잡아 타고 판가리 싸움 벌였는데

공주까지 단검을 던져 흑룡을 괴롭히니

버틸 수 없어 흑룡은 동해로 달아나고

백 장사 파놓은 곳에서 송송

송송 달고 단 하천평 샘물

두만강 가 첫 마을 하천평 샘물

흑룡을 물리쳤던 백 장사

백 장사 아들 딸 살던 곳

아들 딸 손자 손녀가 살던 곳

아 그런 하늘과 땅 옛말 다 묻힌 채

지금은 하루 세 번 작은 버스가 오가고

국경경비대가 신분증 검사로 막는 길

사람은 먹는 일을 하늘로 삼느니

섬기는 하늘은 무엇이겠는가

남은 것은 기댈 데 없이 푸르먼먼 하늘 곳간

한때 호랑이 늑대 날치고 설치던 골

나무는 잘리고 숲은 짓밟혀

바가지 젖은 바가지 마른 바가지 없어

박박 긁어대도 먹을 게 나올 리 없는데

초가 지붕에 앉은 박덩이만 해라 해마다 자리 틀었고

깊으면 안개골이요

늪 가라 늪골

두만강 낀 개바닥에 앉으니 개바닥

큰 소 먹이는 큰소골에다

송아지 기르는 작은소골

중국 사람처럼 구도 촌도 둔도 보도 따르지 않고

고향 이름을 옮겨 리요 동이요 평*

해란강 따라 화룡 룡정이며

룡수평 룡포 룡인 화룡

뿌리든 가지든 어디나 꽂으면 사는

버들로 방천을 만들고 버드나무 사람으로 살자 했으나

가따나 한 해 농사 지어 놓아도

어느 집이나 외통 말라붙는 가난

허덕허덕 사람살이

밤나무 널 판 신주에다 빌 것도 없이

두만강이라거니

콩이 잘돼 콩이 넘치는 강이라는 뜻인가

콩밖에 될 게 없는 땅이란 뜻인가

너머 넘어온 사람 얼마든가 두만강

먹을 게 없어 넘고

나라 빼앗겨 남 땅에 살 수 없어 넘고

먼지 넘어온 핏줄 만나러 넘고

넘다가 쓰러지고 넘다

넘다가 넘다

다 쓸려간 두만강

* 구(勾), 촌(村), 둔(屯), 보(堡), 리(里), 동(洞), 평(坪)

- 박태일 시선집 《용을 낚는 사람들》 중

박태일 시인

◇ 박태일 시인은
1954년 경남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 태생.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미성년의 강〉이 당선하여 문학사회에 나섰다. 시집으로 《그리운 주막》, 《가을 악견산》, 《약쑥 개쑥》, 《풀나라》,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옥비의 달》, 《연변 나그네 연길 안까이》을 펴냈다. 연구·비평서로 『한국 근대시의 공간과 장소』, 『지역문학 비평의 이상과 현실』, 『경남·부산 지역문학 연구 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몽골에서 보낸 네 철』, 『시는 달린다』, 『지역 인문학: 경남·부산 따져 읽기』 등을 냈다. 김달진문학상·부산시인협회상·이주홍문학상·최계락문학상·편운문학상·시와시학상을 받았다. 2020년 정년을 맞아 한정호·김봉희가 엮은 박태일 관련 비평집 『박태일의 시살이 배움살이』가 나왔다. 현재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다.

<시인/경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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