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 칼럼】야만의 경쟁과 김삿갓

조송원 승인 2024.05.12 11:45 의견 0

어떤 유행어를 무심코 듣노라면, 우선 확 반감이 들 때가 있다. 그 말의 의미를 분석, 해석하기 전에 말맛부터 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덕담으로 좋게 받아들이므로 ‘유행’을 하게 된 것이리라. 생각이 예에 미치면, 쓴 맛은 불쾌감으로 심화되기도 한다. 적어도 덕담 값을 하려면, ‘가치 지향적’이야 하지 않은가!

“부자 되세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이 대표적으로 기억난다. 탐욕을 정당화하고, 고달픈 청춘을 합리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깊이 투영된 말이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사회의 귀감임에 얼마나 의기양양해 하겠는가.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는 ‘N포 세대’는 사회의 당연한 현상임을 강변한다.

청부(淸富), 곧 깨끗한 부는 형성 과정이 모범적이므로, 예나 지금이나 존중 받는다.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약탈적 부의 형성은, 소수의 더러운 승자와 다수의 쓰라린 패자만을 낳을 뿐이다. ‘부자 되세요’는 청빈(淸貧)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희망, 외줄타기이다. 다 같이 가난했던 시절, 고공의 외줄타기는 아름다움이었다. 나눠먹어도 누구나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부의 총량이 커졌다. 제대로 몫이 나눠졌다면, 외줄타기 공연은 아름답게 성료(成了)됐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가 과다한 몫을 챙겼고, 그래서 다수에게는 과소한 몫이 돌아갔다. 희망은 ‘희망 고문’이었음을 뒤늦게 깨우쳤다.

결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이고,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라는,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경구도 말맛이 씁쓸한 건 마찬가지이다.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수 있고,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기 위해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슬퍼할 새도, 기뻐할 새도 없이 ‘근면’해야 한다는 말은 인간에서 영혼이 박탈된 기계적 인간에게나 해당되는, 인간비하적인 언사이다.

한데도 이 경구가 회자되는 사회적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해냄/2024)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먼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진단을 보자. 첫째, 한국인은 세계에서 ‘불평등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2014년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에 따르면, “소득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한 사람은 24%에 불과한 반면, “소득 차이가 지금보다 더 벌어져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무려 59%였다. 우리의 전도된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조사 결과이다. 참고로 독일은 ‘평등’에 찬성한 이가 58%, ‘불평등’에 찬성한 이가 16%였다.

둘째,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갈등이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2020년 영국의 킹스칼리지 런던정책연구소의 의뢰로 입소스(Ipsos)에서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28개국 중에서 ‘가장 갈등이 심한 나라’로 밝혀졌다.

12개 조사 항목 중에서 무려 7개 항목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이다. 빈부 갈등, 이념 갈등, 정당 갈등, 남녀 갈등, 세대 갈등, 종교 갈등, 학력 갈등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였다.

셋째, 한국은 타인에 대한 관용도가 가장 낮은 나라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세계가치관조사’ 자료를 활용하여, 52개 국가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한 결과, ‘자녀에게 관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45.2%로, 52위 꼴찌였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 한국이 1,800달러의 르완다(56.4%)보다 관용도가 낮았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너와 나의 직접적인 이야기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같은 반에 성적이 낮은 친구와 어울린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네가 좀 도와줘라,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걔랑 놀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마 사회적 약자를 제외하고는, 그 답은 불문가지이다.

한국, 한국인은 인류 역사상 참 경이로운 민족이다. 세계인을 경탄케 하는 한국 고유의 문화 유물은 무엇일까? 공기의 소중함과 같이 잊고 있지만, 바로 한글이다. 세계의 언어의 수는 7,097개로 집계된다. 일반적으로 말(언어)은 위아래(우열)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을 표기하는 문자(글)는 천차만별이다. 글자의 우열을 가리는 지표는 대개 3가지를 든다. 첫째, 소리(발음)를 정확히 표기할 수 있을 것. 둘째, 익히기(배우기) 쉬울 것. 셋째, 기계화가 가능할 것 등이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기본은 한글이다. 쉬운 예로 자판의 숫자를 생각해보라. 한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본어를 치기 위해서 자판이 몇 개여야 할까? 가타카나가 48개, 히라카나가 48개로 총합이 96개이다. 더구나 한자까지 겸용하고 있다. 물론 로마자도 한글의 우수성에는 아득히 못 미친다.

문제는 이렇게 인류사에 긍정적인 경이로움을 간직한 한국인이 또한 인류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실험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초저출산 문제이다.

한국의 초저출산 문제에 대해서는 외신과 외국 학자들도 높은 관심을 표명하며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목하는 원인은 대체로 높은 경쟁 압력, 고용·주거·양육 불안, 가부장적 가족 문화, 낮은 성평등 의식, 비혼 동거문화와 출산에 대한 폐쇄성 등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경쟁 압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다. 이 경쟁은 경쟁교육에서 비롯된다. 곧 경쟁교육이 현재 한국의 ‘만악(萬惡)의 근원’인 것이다. 다음 글에서 김누리 교수의 글을 참고 하여 자세히 살피기로 한다.

비난은 흐르는 물도 고이게 하여 썩게 하지만, 비판은 고여서 썩은 물도 흐르게 하여 물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현실 비판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비판은 ‘불편한 진실’을 까발려, 사람을 유쾌하지 못하게 하여 회피 심리를 유발한다. 하여 줄곧 비판보다는 비판하면서도 평심이 머물도록 쉼터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삿갓이 어느 집에 가서 밥을 청하니, 주인은 너무 가난해서 단지 멀건 죽 한 그릇을 차려준다. 더 나은 음식을 대접할 수 없어서 무안해하는 주인에게 감사해 하며, 김삿갓은 시 한 수를 읊는다.

粥一器(죽일기)

四脚松盤粥一器(사각송반죽일기)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죽 한 그릇

네 다리 소나무상에 죽이 한 그릇인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
주인은 무안하다는 말 하지 마시오
나는 본디 물에 청산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사랑한다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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