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knight) 역할 놀이 [픽사베이]

<차례>

1. 우리 아이 잘 자라고 있나요?
2. 7세까지 아이의 뇌는 어떻게 배우고 자라는가?
3. 아이들은 논다 : 뇌가 좋아하는 놀이
4. 아이들은 표현한다 : 만들고 그리고 이야기하며 발달하는 뇌
5. 아이들은 일상을 반복하다 : 뇌 발달을 보장하는 하루 일과
6. 아이들은 공간과 호흡한다 : 뇌발달을 지원하는 환경
7. 대한민국에서 지혜로운 부모 되기

# 14. 어린 자아와 창조력을 길러주는 역할놀이

빈약해져 가는 역할놀이

아이가 전화 수화기를 들고 종알종알 이야기한다. “토끼야, 언니 간식 먹고 갈게. 토토로랑 잘 놀고 있어.” 집에 있는 토끼 인형에게 안부 전화를 한 모양이다.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린이집에서 영아들이 놀이할 때 자주 보는 모습이다. 이런 놀이를 상상놀이, 또는 역할놀이라고 부른다.

역할놀이란, 가상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 알맞은 역할의 행동이나 말을 흉내 내거나 연기하면서 이루어지는 놀이를 말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꿉놀이나 엄마놀이가 바로 역할놀이이다. 망토를 걸치고 슈퍼맨을 흉내를 내며 뛰어다니는 아이도, 공주 의상을 걸치고 요리하는 아이도 모두 역할놀이 중이다. 역할놀이가 얼마나 흔한 놀이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런데 요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아이들의 놀이 모습을 보면 역할놀이가 매우 빈약해졌음을 체감할 수 있다. 만4~5세 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엄마놀이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엄마, 아빠, 언니, 아기의 4인 가족이 각자 요리도 하고 회사도 가고, 공부하고, 빠빠 달라고 울기도 하는 꽤 북적이는 놀이였다. 그러나 요즘은 외동이 많아진 탓일까, 여자아이 두셋이 놀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누워있거나 종이에 그림그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겉에서 보면 엄마놀이인지 그냥 그림그리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역할놀이에서 아이들이 설정한 콘셉트나 역할의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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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놀이에도 수준이 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왜 명확한 콘셉트를 찾는지 의아할 것이다. 역할놀이에도 수준이 있기 때문이다. 역할놀이는 단순히 행동이나 말을 모방하는 수준에서 출발하여, 여러 명의 아이가 공통의 콘셉트를 공유하며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놀이하는 수준으로 발달한다. 특히,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유아기를 거치면서 역할놀이는 풍성해진다. 유아기가 되면 자신이 본 것이나 체험한 것을 이미지로 기억하고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의 인지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역할놀이야말로 영유아기 놀이 중 가장 고난도의 인지능력을 필요로하는 놀이라고 생각한다.

역할놀이가 어떻게 풍성하고 재미있는 놀이로 발전해 가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여섯 살 아이 3명이 함께 요리놀이를 하고 있다고 하자. 각자 열심히 접시에 음식모형을 담고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정작 3명이 만든 그 요리를 먹어줄 사람이 없다. 요리를 먹어달라고 선생님을 몇 번 초대했지만 그뿐이다. 이러한 흐름의 놀이는 여섯 살에게 너무 단순해서 지루하게 느껴진다. 여섯 살은 충분히 놀이를 발전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다면 놀이는 훨씬 재미있어진다. 그러려면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엄마’나 ‘식당 주인’이라는 역할이 필요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아빠’나 ‘언니’ 또는 ‘손님’이라는 역할이 주어져야 한다. 놀이는 엄마놀이나 식당놀이로 발전한다. 놀이의 콘셉트와 역할이 정해지면, 아이가 경험한 식탁이나 식당에서 있을 법한 다양한 상황들이 놀이 속에서 재현되기 시작하면 그렇게 놀이는 풍성해진다.

역할놀이를 통해 어린 자아가 확장되고 유연해진다

장난스러운 아이들 역할놀이를 굳이 발전시켜야 할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역할놀이를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는 낮은 인지 수준에 있는 아이들이 일시적으로 거치는 과정쯤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역할놀이야말로 영유아기 유연한 자아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역할놀이에서 아이들의 재미 포인트는 당연히 ‘그 역할’이 되어 보는 것이다. 인형을 업고 의기양양하게 교실을 돌아다니는 아이는 ‘엄마가 되어보기’ 중이다. 평소와 다른 자신이 되어보는 것, 그 신선한 느낌이 아이의 자아를 확장하고 유연하게 해준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이나 ‘자기에 대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아가 확립된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자아는 이제 막 태어난 새싹과도 같다. 자아는 심리학적으로도 복잡한 개념이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가 자아를 가지면서 자신만의 의지와 취향이 생기고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경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른 말을 고분고분 따르던 아이가 사사건건 ‘싫어’를 외치기 시작했다면 ‘자아’라는 틀이 탄생하였다고 보면 된다.

밤마다 샤워하기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화장실에 불이 났어! **소방관님 얼른 와서 불을 꺼주세요!”라고 했더니 부리나케 옷을 벗고 화장실로 뛰어간다. 왜일까? 샤워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씻는 것이 너무 싫은 아이는 ‘용감한 소방관’이라는 느낌의 옷을 입고서야 그 ‘싫은 감정’을 넘어 샤워를 행동으로 옮길 힘을 얻는 것이다. 평소 ‘자아’로는 하기 힘든 일이 때로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잘 되기도 하지 않는가. 어린아이의 자아는 이렇게 새로운 역할의 옷을 입고 다양한 경험에 자신을 노출하며 자아를 확장해 간다. 그리고 그 다양한 경험들이 자기 감정이나 관점을 전환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연함을 길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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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놀이 속에서 아이는 함께 창조하는 법을 배운다

역할놀이는 필연적으로 여러 명이 함께하는 그룹놀이로 발전한다. 그래야 재미가 있으니까. 함께하는 역할놀이가 재미있으려면 무엇보다 ‘내가 연기하는 역할’을 친구들이 알아채야 한다. 나 혼자만 엄마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보기에도 ‘엄마 같아 보여야’ 한다. 그 역할이 할 법한 ‘그럴듯한’ 행동이나 말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특정한 상황이나 맥락에 알맞은 몸짓과 행동, 표정, 말의 내용이나 뉘앙스가 달리하는 고도의 의사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아기’ 역할 중인 친구도 마찬가지다. 친구 역시 행동과 언어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암묵적인 상징들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다.

창조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표현하면 결국 마음먹은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만드는 것이다. 즉, 창조는 무(정신)에서 유(실재)를 만드는 것이며, 혼자만의 상상을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필자는 아이들이 이 창조의 기본 과정을 역할놀이 속에서 연습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 그래서 머릿속에 이미지나 느낌으로 남아있는 것을 모방과 상상을 통해 친구와 공유할 수 있는 ‘세계’로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역할놀이다. 엄마놀이를 하는 아이들 모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엄마 월드’를 함께 창조하여 공유하며 계속해서 창조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되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어른이 되어주자

왜 엄마놀이에는 늘 ‘엄마’를 하려는 아이들이 많을까? 엄마가 아이들의 눈에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멋진 어른보다 TV 속 가상의 캐릭터들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흉내 내는 놀이가 많아졌다. 상업적 캐릭터가 되어보는 역할놀이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일단, 가상 세계에서 탄생하고 존재하는 캐릭터다 보니 아이들이 모방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적이다. 캐릭터를 상징하는 의상이나 행동 몇 가지를 하는 것에 그친다. 손에 잡히는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다 보니 놀이에서 펼쳐지는 상황도 현실성이 떨어지고 그야말로 허구가 된다. 한마디로 놀이가 시시해지기 쉽다. 놀이 속 창조도 현실을 닮아가는 과정 속에서 힘이 생기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되고 싶은’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자. 아마도 아이들이 생활 속에서 멋진 어른들을 지금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접한다면 역할놀이도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놀이 세계를 조금더 진지하게 바라봐주자. 단순히 허구 속에서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을 키우고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떠올리자. 필자는 놀이에 심취한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도 참으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멋쩍어하거나 놀이를 부끄럽게 여기게 해서는 안 되니까.

임지연 박사

◇ 임지연 박사

▷(사)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https://www.ecoikium.org/) 소장
▷서울시 생태친화보육사업 컨설턴트
▷대구교육대학교 생태유아교육 강사
▷호치민시 한국학교 유치원 교사
▷부산대 유아교육학과 학사/석사
▷일본 오차노미즈여자대학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