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수평에 쉬다》(황금알)표지
이런 저런 이유로 한 달 넘게 밀쳐두었던 시집을 들었다. 조승래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수평에 쉬다》(황금알)이다.
조 시인은 2021년 조지훈 문학상을 수상, '일상을 통해 인간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통찰, 간결한 언어로 풀어내는 특유의 시적 세계를 구축한 중견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자는 매주 조 시인의 시 해설을 읽는 행운을 누린다. 조 시인이 본지 <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코너를 운영하는 덕분이다. 벌써 2년 가까이 되었다. 그의 해설은 자신의 시풍처럼 간결하면서도 본질을 꿰뚫는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적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
표지를 넘겨 '시인의 말'을 보았다.
아홉 번째 시집을 내면서
시보다 더 많은 말을 했기에
반성한다.
가까이서 함께 하시는
분들 모두가 여전히 소중하고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다.
시인은 성숙을 넘어 인생사 달관의 경지를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넉넉하면서도 '세상 좋은 사람 표정'의 조 시인이 추구하는 인간상이 그려지기도 했다.
《수평에 쉬다》는 80편의 시편이 주제별로 5부로 구성되었다. 제1부 '불의 맛', 2부 '수평과 공평', 3부 뼈가 굳다, 4부 '절필은 없다', 그리고 제5부 '텃밭 원고지'이다.
시편들의 소재는 하나같이 삶의 일상에서 간택된 것 같다. 자연을 탐구 대상으로 하는 과학자를 자연과학자라 한다면 시인은 삶과학자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먼저 표제시 <수평에 쉬다> 전문을 천천히 읽는다.
승강기에 25층, B1 층 위치 표시등이 켜진 새벽
늦은 귀가와 이른 출타를 한 사람들이 있음을 추측하며
곤충도감 개미집 단면도에서 본 것과 대칭형 구조의
아파트를 비교해 본다.
지하에서 지면으로 나온 개미와 지상에서 지면으로 나온
사람들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은 겨울이지만
누구나 수평에 등을 댄 채 잠들거나 깨고
그 익숙함으로 세상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 아니 좋은가,
햇살이 평평하게 찾아오는 지상의 시간에
층마다 등을 펴고 쉴 수 있는 공간
수직의 이동에서 멈추어 볼 만한 수평이 있으니
아니 그런가,
생사 불문하고 수평은 등 뒤를 쫓아다니고
누군가의 등이 되려는 등나무가
제 등 비틀어가며 가는 그 너머 또 수평이 있으니
'수평'이 공평, 형평을 뜻함을 알겠다. 보통 사람은 고층아파트 펜트하우스에 살기를 바란다. 꼭 펜트하우스까지는 아니라도 반지하는 아니리라. 하지만 펜트하우스에 살든 반지하에 살든 평평한 수평의 방에서 쉬고 잠자는 건 마찬가지다. 인생은 상승의 꿈을 안고 수직으로 움직이지만 종국에서 모두 수평에서 쉰다. 그 극단의 순간이 죽음이라는 '수평의 세계관'을 펼쳐보인다.
우리 삶에 관한 시인의 '수평적 구도'는 신선하면서 직관적이다.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이 있다. 같은 수평적 구도로 삶을 해석하더라도 불평등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비관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인생은 종국에는 수평에서 쉰다'고 통찰, 인생의 공평함을 수용하는 긍정적 세계관을 펼쳐보인다.
조 시인의 이 같은 통찰은 사유의 결과물이다. 삶의 통찰은 사유에 의해 얻어진다. 데카르트가 사유(또는 의심)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듯이, 조 시인은 사유를 통해 시인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다.
자벌레가 배밀이로 조금 더 멀리 가려고 했고
지렁이는 마당을 가로지른 흔적을 남겼고
발들은 등불 켰다 끄기를 밝아질 때까지 반복했다
제 몸만큼 제 마음만큼 쓰다가 쉬었다가
다시 이 세상 원고지 위에 긁적이는 그 어느 존재들도
시詩를 다 쓰더라고 굳이 말하는 이는 없었다
멈추었으면 삶이 아니다
삶은 멈추지 않는다
- <절필은 없다> 전문
절필(絶筆)은 시인, 소설가 등 글을 쓰는 사람이 글쓰기를 완전히 그만둠을 뜻한다. 시인에게 시작詩作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삶, 그것도 사유하는 삶이다. 그런 만큼 그에게 절필은 삶이 멈춘 상태, 삶이 아닌 상태이다. 그럴 일은 없다고 시인은 단언한다. 삶이 계속되는 한 절필은 없다, 살아 있는 한 시 쓰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이유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승래 시인은 경상남도 함안 군북 출신으로, 2010년 문예지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는 등단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몽고 조랑말》, 《내 생의 워낭소리》, 《타지 않는 점》, 《하오의 숲》, 《칭다오 잔교 위》, 《뼈가 눕다》, 《어느 봄바다 활동성 이루에 대한 보고서》, 《적막이 오는 순서》 등 다수의 시집을 출간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세종도서 문학 나눔 선정(2015), 영남문학상(2019), 계간문예문학상(2020), 조지훈 문학상(2021)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