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소설 「신불산」(754) 제7부 돌아가는 꿈 - 제17장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8)

이득수 승인 2024.05.29 09:00 의견 0

영순씨가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표정이라

“무슨 일이 있기는? 나이 들어서 그렇지. 우리 누님이 젊어서 여북 고생을 많이 했나?”

하다 앗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스무 살 남짓해서 정신분열증을 겪은 백찬씨와 일찬씨, 7남매 중에서 제일 머리가 똑똑하다는 두 사람이 겪은 그 어두운 터널, 나머지 5남매까지 너무나 당황하고 무섭고 음울하던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제17장 천하장사, 순찬씨가 무너지다(8)

“외삼촌 오시능교?”

과묵한 장조카 상철씨가 딱 한마디를 하며 고개를 꾸뻑이자 “!”

눈빛에는 분명히 반갑다거나 어서 오세요라는 느낌이 돌았지만 조카보다 더 말이 없는 큰 질부가 고개를 숙이는 듯 마는 듯 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누님!”

“형님!”

“고모!”

“고모님!”

넷이 거의 동시에 인사를 하고 차례로 손을 잡는데

“아이구, 우리 부산 동생 열찬이, 동장님, 시인님, 국장님!”

한순간 눈이 반짝하더니 마치 두꺼운 커튼을 친 것처럼 완강하게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거였다. 그렇게 입에 붙었던 할렐루야나 주여를 안 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열찬씨가

“우리 누님이 와 이래 됐노? 김해중앙교회 극성 권사님이 할렐루야도 한 번 안 하네.”

조금은 찌그러진 얼굴이며 흐릿한 눈동자와 꽉 다문 입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데

“우리 정석이는 장개 갔나? 아아는 놓고?”

정석이 결혼식 날 언양에서 서울까지 왕복하면서 그렇게 신이 나서 계속 할렐루야를 찾으며 전도를 하려고 하던 누님이 왜 이러나 싶은데

“예. 고모 아이는 두어 달 있으면 나오고요.”

하며 제 아내를 쳐다보자

“어데서 처자는 참 키 크고 참한 처자를 구해왔네!”

하고 완강하게 입을 닫았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를 쳐다보는데

“외삼촌!”

늘 밝은 표정의 둘째 용철씨가 생글거리며 제 아내와 아들딸 남매를 데리고 들어오는데 몸도 약하고 숫기가 없어 역시 말이 없는 둘째 며느리와 두 아이도 고개만 까딱했다. 상석까지 일곱 명이 앉는 소파에 누님, 열찬씨 가족과 상철, 용철 두 형제가 앉고 나머지는 거실바닥에 판을 펴고 아이어른 열세 명이 점심을 먹는데 역시 제사를 안 지내 제사음식은 없지만 평소 손이 커서 넉넉하게 음식을 장만하던 순찬씨의 영향으로 떡과 생선, 고기와 나물과 지짐이 다 푸짐했다.

“자, 외삼촌 한 잔 하이소. 서울동생 니도 한 잔 하고.”

장남 상철씨가 소주병을 들고 열찬씨부자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잔을 부어

“자, 드십시오.”

하며 잔을 들어 건배를 하는 것이 오늘은 말이 좀 많아진 것 같았다. 체질적으로 술이 안 받는 차남 용철씨가

“오늘은 엄마가 말이 없으니까 우리 형님이 신났네. 집에서 저래 외고 펴고 술 마시는 것 처음 보네.”

하고 웃더니

“참 집에 양주선물 들어온 기 하나 있어 가주왔는데 나중에 외삼촌 가주가소.”

하며 이미 얼굴이 빨개진 제 형을 보며

“형님이 술 마시면 꼭 우리 아부지 같아. 나이가 드니 점점 더 하네.”

하며 제 형을 바라보는데 열찬씨도 꼭 죽은 매형 재근씨를 보는 것 같아

“상철이 니는 너거 아부지 닮아 술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그 동안 누님이 무서워서 술을 우째 묵었노?”

“예. 정 생각나면 밖에서 한잔씩 묵고 들어오고 뭐 그렇지요. 집에서 술을 먹는 것은 일 년에 딱 두 번.”

“딱 두 번이라, 언제?”

“예. 엄마가 사탄인 술을 예외적으로 집에 들이는 것이 설, 추석 명절 때 외삼촌 온다고 소주 한 병씩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는데 외삼촌 대접하면서 한 잔씩 얻어먹는 것 말입니다.”

“그래? 한 번씩 내가 안 올 때면?”

“그건 완전 재수지요. 엄마 없을 때 저 혼자 한 병 다 마신다 아입니까?”

하며 부지런히 식사를 하는데

“보소. 당신이 이렇게 식사만 할 것이 아니라.”

영순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

“그라면 밥이나 묵지 우리 권사님이 아픈 판에 찬송을 하겠나, 노래를 하겠나?”

“그 기 아이고 조카들이 외삼촌을 꼭 오라고 부를 때는...”

“그래 부를 때는?”

하던 열찬씨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너거가 지금 우리 엄마가 이러니 외삼촌이 보고 가라는 거지. 그리고 요양병원이나 어데 입원시켜도 그리 알라고 말이지?”

두 조카와 질부를 차례로 훑어보니

“예. 사실은 그 이야기를 우리 미숙이가 오면 이야기드릴려고 했는데.”

용철이가 말을 흐리는데

“외삼촌 오셨네요! 숙모하고 정석이도 오고.”

제 어미를 닮아 거침없는 성격에 목소리가 크고 말에 막힘이 없는 미숙씨를 필두로 둘레둘레 창원시에 모여 사는 미경이, 미옥이 3자매가 제 각기 남편과 아이 둘씩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대충 수인사가 끝나고 사위 셋을 둘러앉게 하고 열찬씨가 술을 한 잔씩 권하니 역시 광신도에 가까운 김미숙집사의 남편인 큰 사위 박서방은 손을 저으며 물러앉고 두 사람만 받는 시늉을 하는데

“야, 우리 처가집에 웬 소주가 다 있네!”

막내사위 임서방이 신기한 듯 바라보자

“인자 엄마가 말이 없으니 내가 큰맘 먹고 소주 세 병을 샀다. 외삼촌도 오시고 하니.”

하면서 소주 두 병을 더 꺼내오는데 그렇게 술을 사갈시하던 순찬씨가 자손들을 비잉 둘러보며

“너거 외삼촌하고 한 잔씩 해라. 나는 자러 갈란다.”

꿈에도 상상 못 할 술을 마시라는 말을 다 하는 것이 모두다 어안이 벙벙해 쳐다보는데

“참 정석이는 장가갔나? 아아는 놓고?”

방문을 열려다 뒤돌아봐서 상미씨가 벌떡 일어서는데

“처자는 키도 크고 새첩고 삼동갖네.”

하고 들어갔다.

“자, 너거 밥은 좀 늦더라도 삼촌 계실 때...”

용철씨가 제 누이들을 죽 둘러앉게 하고

“외삼촌! 우리가 엄마를 우짜면 좋겠능교?”

묻자 모두들 열찬씨의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데 한참이나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영순씨와 눈을 한번 맞춘 열찬씨가

“집안에 달리 어른도 없고 내가 외삼촌이라 이래 불러서 물어보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

“이건 내 누님의 일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순전히 자식인 너거들의 문제이다. 처리를 잘 하거나 못 하면 기쁘거나 섭섭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뭐 우짤 수는 없다. 그라고 너거 작은 삼촌 백찬이가 오거나 다른 형제인 두 이모가 와도 마찬가지다. 너거가 최선을 다 해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든지, 이미 치료가 안 되면 요양병원에 보내든지 우리는 너거 처분대로 따르고 단지 한두 번씩 우리 누님을 보러가는 일밖에...”

“...”

말을 마치고 주욱 둘러봐도 말은 않지만 다들 수긍하는 눈치라

“너거 생각은 어떻노? 장남 상철이 생각은?”

하니 얼굴이 빨개진 상철씨가 동생 용철씨를 바라보는지라

“이야기라면 김미숙집사 아이가? 미숙이 니가 말할래?”

“아이다. 그래도 아들인 작은 오빠가 하든지.”

하자 용철씨가

“형님하고 대충 이야기한 건데 명절이 끝나고 다들 직장에 나가면 그래도 제일 가까운 곳에서 자유업을 하는 제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한 번 더 가볼 겁니다. 만약 큰돈이 들면 장남인 형님하고 의논하겠지만 엔간한 잔돈은 제가 내지요. 그라고 요양병원에 입원해야 될 경우에는 매달 들어가는 돈은 다시 의논을 해야지요.”

“그래 혹시 요양병원은 알아봤나?”

“예. 보통 5,60만원하는 데는 시설이나 식사도 형편없고 또 잠자리도 시끄럽고 해서 진영의 불교재단에서 하는 곳에 알아보니 한 달에 백만 원이 좀 넘는데 조용하고 깨끗하고 음식도 잘 나오고 종업원들도 다 친절하고.”

“그래 돈도 문제지만 너거 엄마가 불교재단에서 하는 데 갈라커겠나?”

“아임니더. 엄마는 인자 기독교도 불교도 아닌 그냥 늙은 할맴더.”

“그래. 돈은?”

“예. 우선 제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한 10 푸로 깎고 또 엄마 앞으로 방세 나오는 것도 조금 있고 노인수당까지 합하면 한 30만원 더 필요한데 제가 왔다갔다 돌보고 입원비관리하고 30만원은 형님이 20만원, 형편이 좀 나은 막내가 10만원씩 내기로 하고 말입니다.”

“그래. 상철이 하고 미옥이도 그래 하는 데 이의 없제?”

두 사람이 수긍하자

“그라면 그래 해라. 나중에 입원을 하든지 하면 연락하고.”

마침내 늦게 온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열찬씨는 두 조카사위와 상철씨와 남은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외삼촌!”

큰딸 미숙씨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가족예배를 보려는데 기도 좀 해주세요?”

“기도라?”

“예. 그 때 엄마칠순 때 보니까 기도를 참 잘하시데. 그 때 삼촌 가고 나서 웬만한 목사보다 낫다고 했어요?”

“에이, 내용이 좋으면 뭐해? 그건 공식회의나 축제, 발간사 같은데 인사문을 많이 쓰서 그렇지만 기도의 기본인 믿음이 부족하잖아?”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지. 삼촌도 교회에 다녔잖아요? 그리고 삼촌의 기도에는 무엇보다 솔직하고 절실한 간구가 담겨있어요. 또 너무 길지도 않고 적당한 시간에 할 말을 다 하고.”

“이거 쑥스러운데...”

새삼 아들내외를 쳐다봤다. 여태 기도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데다 둘 다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신자이기도 했다.

“인자 엄마가 아파서 기도고 찬송이고 하려들지도 않고 또 그런 엄마를 빨리 나으라고 기도해줄 사람이 외삼촌밖에 더 있어요?”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네.”

하고 잠깐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는데

“너거 외삼촌은 공무원이 아닌 교수나 성직자를 했으면 더 좋았을 거야. 교회에도 안 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저래 천연덕스럽게 기도를 하는지 신기하지만 그 내용이 참 간절하기는 하지.”

하면서 빨리 시작하라는 눈짓을 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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