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월에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김영춘(편집주간)
작년 12월 3일부터 넉 달 동안 나는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영화 <쥬만지>에서 마법의 게임판이 만들어내는 희한한 세상에서 봉변당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느낌이었달까?
내게는 아주 소박한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런저런 문제는 있어도 후진국에서 출발해 불과 수십 년 만에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세계사적 모범국가라는, 많은 국민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던 그런 자부심이다. 그런데 이 자부심이 뚱딴지같은 계엄령 사태를 저지른 현직 대통령과 그 비호세력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또 하나의 작은 기대가 남아있었다. 한 줌 밖에 안되는 돈키호테들이 벌이는 칼춤을 징벌하는 거대한 국민의 바다가 살아 있다고 말이다. 그 깨어있는 시민의 엄정한 심판은 이념의 좌-우와 정파를 불문하고 작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4개월여의 대한민국은 이런 기대마저 일시적으로 짓밟히는 시간을 보냈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양심과 이성은 패대기친 채 파당적 편싸움에 휩쓸린 다수 국민들을 지켜본 경험은 실로 충격이었다. 다행히 윤석열이 파면되었지만, 이번 사태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인본세상』이 이번 호 특집의 주제를 ‘계엄령 내란 사태의 민낯’으로 정한 이유이다.
먼저 특집 모두에는 법원장과 헌법재판관을 지내신 김종대 변호사님께서 헌법정신과 조문으로 바라본 바람직한 국가 지도자상, 특히 그 역할과 임무에 대해 설파하셨다. 부경대 정외과의 차재권 교수님은 이번 계엄내란사태의 미시적 요인과 거시적 배경을 분석하였고, 한림대 미디어스쿨의 송현주 교수님은 이번 사태를 전후한 우리나라 언론과 유튜브 등 뉴미디어의 문제를, 최병학 목사님은 윤석열을 뒷받침하는 극우세력의 실체를 해부하였다. 특집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매호 청년자영업자의 시선을 연재하는 장백산 님이 이번 변고에서 광장 한 켠의 중심에 선 20~30대 MZ세대 우파의 형성 배경을 추적해 주었다. 또한 본 연구소 남송우 이사장님의 국제신문 기고글 <당신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역시 탄핵 반대파의 핵심을 이루는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을 신앙적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어 전재 소개한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편에서 열린 일련의 탄핵 찬성 집회에서는 젊은 MZ세대 여성들의 적극 참여가 뉴스의 한 꼭지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신세대의 참여가 집회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떼창 노래까지 바꿔버리는 문화적 전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동안 <음악산책>을 연재해 온 나눌락 대표 박선영 님이 벽을 넘어서는 국내외 신세대 여성가수들과 걸그룹들의 음악을 소개하는 멋진 글을 적시에 올려주셨다. AI시대의 도래는 이미 대세가 되어버려 『인본세상』에서도 작년 25호의 특집으로 다룬 바 있지만 여전히 그 경제적, 사회적 파급력은 거세다. 동양대 AI융합연구센터장 김호림 교수님의 글은 이번 12.3 계엄사태를 무력화시킨 시민의 대응에서도 뉴미디어와 AI의 사용이 크게 주효했음을 지적하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도 정확한 정보의 실시간 공유를 가능케 하는, 신기술의 ‘선한 도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이번 27호는 온통 12.3 계엄내란사태로 도배가 된 듯하다. 편집진은 특집에 국한해서 이 문제를 다루려 했으나 우리 국민들에게 워낙 충격이 컸던 사건이고 현재진행형의 중대사이기 때문에 각 분야의 필자들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한국마사회 부산경남본부에서 말과 경마의 역사에 대해 좋은 글을 보내주셨고, <해외통신>에서는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는 존 정 님이 트럼프발 충격으로 변화되는 미국의 인력시장에 대한 글을 보내주었다. 본 연구소 소장이신 김해창 교수님은 연초에 동부 시베리아-만주 지역의 홍범도 장군 독립투쟁 루트 답사기를 기고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100년 전 역사가 지금에도 면면히 이어져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나라는 지난 시대의 애국 활동과 민주화 과정에서 숨져간 선인들의 피가 아직도 집단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벌어진 시대착오의 계엄내란사태가 정의롭게 단죄되고 다시 바로 서는 나라가 되기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열망한다.
우리는 4.4 헌재 판결을 통해서 비로소 쥬만지의 황당무계한 세계로부터 탈출해 현실 세계로 막 돌아왔다. 제 정파는 바로 치러지는 대선을 통해 서로 다른 견해를 표출하고 경쟁하되 결과에는 깨끗이 승복하는 민주주의의 경연장을 보여주기 바란다. 이번 내란사태도 승복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시작하자.
<제16·17·20대 국회의원, 전 해양수산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