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창조도시 부산’ 소프트전략 (18)자성대를 ‘부산진성’으로, 한·중·일 호국평화공원으로 되살리자

김 해창 승인 2020.04.29 11:21 | 최종 수정 2020.04.29 21:19 의견 0
자성대 서문 좌우의 우주석
자성대 서문 좌우의 우주석. [사진=김해창]

부산 동구 자성대(子城臺), 즉 '부산진성(釜山鎭城)’은 한·중·일의 전쟁과 평화가 깃든 흥미로운 역사공간이다. 역사 인물로 보면, 임진왜란 때의 정발 장군과 왜장 소서행장, 명나라 장수인 천만리, 만세덕의 스토리가 겹친다. 또한 자성대 일대는 독립운동가인 박재혁 의사, 부부 독립투사 최상운·변봉금, 임정요인 장건상 등 애국지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부산의 근대 선각자 박기종, 동명목재 강석진, 국제그룹 양정모 등 부산지역 산업의 선구자들이 자성대 인근에서 사업을 일으켰다. 이러한 자성대의 역사자원을 바탕으로 ‘부산진성’의 역사 정체성을 되찾고, 이 일대를 한·중·일 호국평화공원으로 만들어 국제평화교육의 거점으로 삼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부산진성은 역사적으로 4기의 변화를 겪는다. 1490년(성종 21년)에 처음 축성됐는데 위치는 증산공원 일대로 현재 정공단 외삼문을 남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기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성이 함락이 된 뒤 증산(甑山)과 자성대에 왜성이 축조되고 7년간 점령 하에 있게 된다. 3기는 왜란이 끝나고 조선군이 자성대 왜성을 이용해 다시 쌓은 부산진성이 그 뒤 400여년간 지속됐는데 현재 남아있는 그림·고지도·사진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 부산진성의 모습이다. 4기는 해방 이후 도시화되면서 부산진성이 사라져가고, 1974년 자성대에 서문과 동문 등을 복원하면서 만든 ‘부산진지성(釜山鎭枝城)’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왜군과 명군이 물러난 뒤, 조선은 자성대 왜성 위에 부산진성을 재건한다. 당시 성의 둘레는 506m, 높이가 3.9m였다. 동헌과 객사, 동서남북에 각각 웅장한 문루가 들어섰다. 서문엔 ‘남요인후(南邀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이란 우주석을 세웠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국경,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라는 뜻으로 강한 호국의지가 읽히는 글귀다. 오늘날 부산진성은 도시개발에 밀려 현 자성대를 빼놓곤 대부분 사라졌지만, 성남(城南)초등학교, 성동(城東)중학교, 부산진(釜山鎭)시장, 남문(南門)시장 등 부산진성이 남긴 지명의 자취도 많다. 자성대 동편에 조선통신사역사관과 영가대를 복원한 것도 부산진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부산진성의 역사 현장으로 한번 되돌아 가보자.

자성대 즉 부산진성의 역사인물로 으뜸은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이다. 정발은 선조 25년(1592년) 4월 13, 14일 일본의 제1군 1만8,000여 명의 군사가 700여 척에 분승해 부산을 내습했을 때 길을 내놓으라는 왜군의 ‘가도(假道)’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고 3000여(병력 600~1000명 추정)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그러했기에 적군도 정발의 용전분투를 높이사 임란 때 가장 용감한 장수가 부산의 ‘흑의(黑衣)장군’이라 했을 정도이다. 영조 37년(1761년) 좌수사 박재하가 공의 전망비를 세웠으며 영조 42년(1766년)에는 첨사 이광국이 정공단(鄭公壇)을 마련했고, 조정에서는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임란 당시 이틀간의 부산진전투를 그린 기록화인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보물 제391호)에는 중앙에 부산진성 남문에서 검은 갑옷을 입고 전투를 이끄는 ‘흑의장군 정발’이 그려져 있다.

변박의 부산진순절도(1760년, 육군 박물관 소장).

이 자성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침략자인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1555-1600)이다. 고니시는 임진왜란 당시 제1진으로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이후 대동강까지 진격해 평양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원군에게 패해 평양성을 불지르고 서울로 퇴각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의 이덕형, 명나라 심유경 등과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으로 쳐들어왔다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철군명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본 내전에서 라이벌이던 가등청정(加籐淸正: 가토 마사요시)측과 싸우다 패해 가톨릭 교리에 따라 할복 자결을 거부하고 효수당했다.

재일 사학자인 이진희는 『왜관·왜성을 걷다: 조선 속의 일본(倭館·倭城を步く: 李朝のなかの日本)』(1984)이라는 책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가 임진왜란이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 생각해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명나라 측과 강화교섭에 나섰으며, 조선군에 대해서도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는 점을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하고 있다.

자성대에 등장하는 명나라 장수는 2명이다. 한 명은 만세덕(萬世德, 1547-1603), 다른 한 명은 천만리(千萬里, 1543-?)이다. 만세덕은 산서성(山西省) 출신으로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전투사령관으로 철수하는 왜군을 부산 해안까지 추격했고, 명군의 주력이 철수한 후에도 한동안 조선에 남아 있었고, 자성대에 만세덕군(萬世德軍)이 진주한 일이 있어 자성대를 만공대(萬公臺)로 부른다는 설도 있다. 또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는 하남성(河南省) 출신으로 영량사(領糧使)로서 우리나라에 기마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 곽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동래까지 왜군을 추격해 공을 세웠는데 전쟁 뒤 조선에 남았다. 선조는 천만리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고 훗날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천만리는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중시조가 됐다.

자성대공원 진남대 인근의 천만리 장군 공덕비
자성대공원 진남대 인근의 천만리 장군 공덕비.

자성대공원 아래쪽엔 영가대(永嘉臺)와 조선통신사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이 붙어 있다. 영가대는 조선통신사가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비는 해신제를 지내고 일본으로 출발한 곳이며 조선통신사역사관은 2010년에 개관했다. 자성대공원 위쪽 한 편에는 최영사당(崔瑩祠堂)도 있다. 최영(1316-1388) 장군은 왜구 섬멸에 앞장섰으나 부하이던 이성계에 의해 참수됐는데 그 뒤 무속에서 장군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이 사당은 지방민의 힘으로 건립됐다.

‘독도 지킴이’ 안용복(安龍福, 1652 또는 1658-?) 장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안용복은 숙종 때 좌수영 수군인 능로군(노꾼)이었지만, 왜인들에게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받는 등 큰 업적을 세워 장군으로 추앙받았다. 안용복 장군이 살았던 곳이 ‘좌자천(佐自川)’으로 지금의 동구 좌천동 일대이다. 이러한 호국정신은 일제 강점기 자성대 일대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16년 9·13 부산진 항일봉기가 대표적인데 영가대 남구(南口)에서 제1호 전차레 한 여성이 치어숨지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자 수백명의 애국 항민들이 봉기해 전차를 전복시키고 수천명으로 늘어난 시위대가 경부철도를 차단해 11시간이나 철도운행이 중단되고 47명이 소요죄 등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또한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와 오택(吳澤), 최천택(崔天澤) 선생의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부부 독립투사 최상운(崔商雲) 변봉금(卞鳳今) 선생도 좌천동 출신이며, 임정요인 장건상(張建相) 선생도 자성대 주변에서 살았다. 게다가 1922년, 1923년, 1929년 조선인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인 조선방직 노동투쟁이 있었던 곳도 바로 이 일대이다.

자성대 일대는 또한 부산 산업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다. 부산의 대선각자 박기종(朴琪淙, 1839~1907)도 좌천동에 연고가 있었고, 동명목재 회장 강석진(姜錫鎭, 1907-1984)이 좌천동에서 동명(東明)제재소를 설립했으며, 국제그룹 회장 양정모(梁正模, 1921-2009)는 범일동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사업을 배웠다. 이처럼 자성대 주변 범일동과 좌천동은 호국과 애국정신이 충만한 터였다.

1872년 군현지도 중 부산진성 세부. [출처=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성대공원 주변에는 유서깊은 시장도 많다. 조선시대에 개설되었던 부산장의 명맥을 이은 부산진시장과 바로 옆에 부산진 남문시장(南門市場)이 붙어있고 이들 시장 주변에는 ‘한복거리’, ‘미싱거리’가 있다. 부산진시장 가까이에는 부산가구점의 발상지인 ‘ 좌천동 가구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엔 평화시장과 자유시장이 있고, 옛 조방 인근에는 ‘조방낙지골목’과 ‘조방돼지국밥골목’이 유명하다.

부산동구청은 2019년 9월부터 약 4개월간 동구 범일2동 자성대 일원에 대해 ‘도시재생 뉴딜사업 연계 자성대와 부산의 유래 연구 스토리텔링 북제작 용역’을 실시했다. 자성대의 부산 기원설과 동구 내 역사와의 연계성을 발굴하여 인문문화자산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역사문화콘텐츠, 관광, 교육 등 다방면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다. 이 연구에 필자를 비롯해 박창희 스토리랩 수작 대표, 성현무 고신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준호 디자인디 대표가 참여해 2020년 초 스토리텔링북을 제작한 바 있다.

이제 이러한 자성대(부산진성)의 역사와 주변 자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부산진성’의 이야기를 이렇게 한 번 풀어내보면 어떨까?

첫째, 자성대의 이름을 부산진성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부산진성은 부산진지성(支城), 부산성(釜山城), 자성대(子城臺), 환산성(丸山城), 소서성(小西城) 등 다양하게 불려왔다. 왜군들이 자성대 왜성을 자성(子城)이라 부르며 사용한 기간은 7년에 불과하고, 조선 후기에 부산진성이 존속한 기간은 무려 400년이다. 그렇다면 응당 자성대란 이름 대신 ‘부산진성’ 또는 ‘부산성’으로 불러야 옳다. 부산진성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곧 부산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문제다. 부산동구청이 지역 학자, 시민과 더불어 향후 ‘부산진성 역사 되찾기’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둘째, 부산진성(자성대)을 중심으로 ‘한·중·일 호국평화테마파크’를 만들어보자. 자성대와 관련된 정발 장군, 왜장 고니시, 명나라 장수 만세덕·천만리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자성대공원을 ‘한·중·일 호국평화공원 부산진성’으로 만들어보자. 우선 역사인물의 스토리를 공원 안팎에 심자. ‘청년기획단’을 조직해 청년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통해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역사체험 및 교육의 장으로서 ‘역사인물축제’를 기획해보자. 향후에 한·중·일 시민들이 동아시아의 미래평화를 이야기하는 장으로서 ‘한·중·일 평화포럼’을 만들거나 ‘한·중·일 역사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셋째, 자성대공원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산업박람회’을 열어보자. 자성대의 역사문화콘텐츠와 일대의 다양한 상권을 연계한 새로운 개념의 ‘도심형 역사문화산업박람회’를 개최하여 동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벡스코가 아니라 도심의 시설과 거리 자체가 박람회의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성대공원은 물론, 진시장, 남문시장, 한복거리, 미싱거리, 돼지국밥골목, 더 나아가 귀금속타운, 이바구길까지도 박람회장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와 협의해 매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이 행사를 개최하면 어떨까? AR(증강현실) 콘텐츠를 개발해 방문객이 전용앱을 다운받아 박람회장 곳곳을 누빌 수 있도록 해보자. 이 기간에 ‘한복주간’을 연계해 개최할 수 있고, 별도로 ‘자성대 재봉틀(소잉머신) 페스티벌’을 기획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넷째, ‘부산진성 스토리 북 및 지도’를 제작하고 이 일대의 역사투어를 실시하자. 부산진성이 갖는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과 전략 요충지적 성격을 고려하여 자성대공원을 중심으로 도로 탐방코스를 만들어보자. 코스는 가령 자성대 내 둘레길과 옛 부산진성 성곽(성문) 역사탐방, 부산포 개항 흔적길, 그리고 자성대~부산항 부두길 등 4~5개 루트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콘텐츠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국내외에 홍보하는 것은 어떨까?

자성대, 즉 부산진성은 부산의 역사지층으로 그야말로 부산의 ‘오래된 미래’이자 ‘부산 역사의 중심’이다. 부산진성의 역사를 풀어가면서 부산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부산의 브랜드를 세계화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경성대 교수·환경경제학 박사, 소셜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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