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지리산 산책 (130) 이현정 박사 ‘다산이 그리워한 차 백운옥판차’ 주제 목압서사 특강

다산의 제자 이시헌, 스승 제다법으로 차 만들어
100년 이상 '다신계' 약속 지켜 다산가에 차 공급
그 집안 이한영, 일제시기 최초로 상표 붙여 유통

조해훈 기자 승인 2023.04.05 00:48 | 최종 수정 2023.04.07 13:52 의견 0

이현정(이한영 茶문화원장) 박사가 지난달 3월 31일 오후 6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목압서사 3월 초청 인문학 특강’에서 강사로 나서 ‘다산이 그리워한 茶 백운옥판차’를 주제로 강의했다.

‘백운옥판차(白雲玉板茶)’는 전남 강진의 백운동에 거주하던 이한영(李漢永·1868~1956) 선생이 1920년대 한국 최초로 차(茶) 상표를 부착하여 판매한 차이다.

그러면 이 박사의 강의 내용을 정리해 백운옥판차를 만든 이한영이 누구인지 살펴보겠다. 이한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를 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압서사 연빙재 앞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현정 박사, 세 번째가 필자이다. 사진제공=목압서사
목압서사 연빙재 앞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현정 박사, 세 번째가 필자이다. 사진제공=목압서사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유배 살던 1812년 9월에 제자인 초의선사·윤동 등과 함께 월출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백운동 별서정원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당시 백운동 별서의 주인은 이곳의 4대 동주인 이덕휘(李德輝·1759~1828)였다. 다산은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별서정원과 다산초당을 그리게 하였다. 그런 다음 백운동의 12가지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시를 지어 합첩한 백운첩을 만들었다. 그 백운첩을 이덕휘에게 선물했다. 이 무렵 이덕휘의 부탁으로 당시 10살이던 그의 아들 이시헌(李時憲·1803~1860)이 다산의 막내 제자가 되었다. 이시헌은 그동안 다산의 저작으로 알려진 이덕리의 「동다기(東茶記)」 또는 「기다(記茶)」가 포함된 『강심(江心)』을 1830년 이후에 필사해 책자로 만든 인물이다.

입산조인 이담로(李聃老·1627~1701) 시대에 별서였던 백운동별서 정원은 2대 동주인 이언길(李彦吉·1684~1767)의 만년인 1756년 이후 온 가족이 이거하면서 생활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백운동의 동주들은 원주 이씨다.

1940년 일본인 모로카 다모쓰(諸岡存·1879~1946)와 이에이리 가즈오(家入一雄·1900~1982)가 『조선의 차와 선(禪)』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강진 백운동의 차가 갑자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이리는 1932년 전남 산업부 산림과로 발령받은 이래 1938년 전라남도 임업시험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3년간 전남의 차 산지를 답사해 기록으로 남겼다.

백운옥판차에 대해 특강을 하는 이현정 박사. 사진=조해훈
백운옥판차에 대해 특강을 하는 이현정 박사. 사진=조해훈

1939년 2월 23일 이에이리는 강진읍 목리에서 유재의(劉載義·1894~1971)를 만나 백운옥판차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이 차는 떡차가 아닌 잎차였다. 이틀 뒤인 2월 25일 이에이리는 강진 성전면으로 당시 71세인 이한영을 찾아갔다. 이한영은 이에이리와의 인터뷰에서 “금릉월산차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는다”고 덧붙였다.

이한영은 이담로의 8대손이다. 이담로의 손자 이언길의 맏아들인 이의권(李毅權·1704~1759)이 백운 별서를 물려받아 이후 9대에 걸쳐 이어왔고, 이한영은 둘째 아들 이의천(毅天)의 5대손이다.

이시헌은 다산의 제다법에 따라 돌샘물로 반죽해 인판에 찍어낸 삼증삼쇄 떡차를 지속적으로 만들었다. 이한영의 백운옥판차는 이전처럼 삼증삼쇄 이후 분말을 내어 떡차로 찍어내지 않고, 항아리에 보관하는 방법을 개발해 잎차 형태로 발전시켰다. 다산이나 이시헌 당대에는 곡우 때 딴 여린 잎으로도 떡차를 만들었다.

이한영은 처음으로 표준화와 상표 개념을 도입해 상품 포장까지 해서 직접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백운옥판차·금릉월산차·월산차 등의 상표명이 지금까지 확인된다.

백운옥판차는 찻잎 크기와 제다방법에 따라 맥차(麥茶)·작설(雀舌)·모차(矛茶)·기차(旗茶) 4등급의 차로 구분되었다. 맥차는 싹이 갓 돋아난 어린 순을 딴 것으로 아주 소량만 만들어 다산가에 보내었고, 작설은 맥차 생산 후 싹의 끝이 둘로 갈라진 것, 모차는 맥차 생산 후 싹이 셋 이상 갈라진 것, 기차는 잎이 커서 넓어진 것을 말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을 마치고 제자들과 헤어지게 된 다산은 ‘다신계(茶信契)’를 맺어 인연을 지속시킨다. 『다신계절목』에 다신계의 내용이 있다.

이현정 박사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 사진제공=목압서사
이현정 박사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 사진제공=목압서사

이 박사는 “다신계는 스승인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으로, 이 약속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의(信義)’였습니다. 다산의 가장 어린 제자였던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고, 집안에 전승되어 100년 이상 지켰습니다.”라며, 신의를 지킨 차 가문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것 같았다.

1827년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 중에 “차의 일은 이미 해묵은 약속이 있었으니 이번에 환기시켜 드리네. 조금 많이 보내주면 고맙겠네.(茶事旣有宿約, 玆以提醒. 優惠幸甚.)”라고 하며 차를 부탁하였다.

1830년 3월 15일에 다산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차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편지글을 통해 이시헌이 해마다 다산에게 차를 만들어 보내고 있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다산 사후 21년이 지난 뒤에도 차의 인연은 지속되었다. 1857년 11월 22일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이 이시헌에게 보낸 「백운산관에 보내는 정학연의 답장(謹拜謝上白雲山館經几下)에서는 “네 첩의 향기로운 차와 여덟 개의 참빗은 마음의 선물로 받겠소. 깊이 새겨 마지않소(四帖香茗, 八箇細篦, 仰認心貺, 鐫感曷極)”라고 하였다. 이시헌은 다산의 사후에도 계속해서 다산가로 차를 보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현정 박사가 만든 '백운옥판차'. 사진제공=이한영 차문화원
이현정 박사가 만든 '백운옥판차'. 사진제공=이한영 차문화원

또한 이시헌의 아들 이면흠(李勉欽·1834~?)이 1889년 7월 25일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도 “항명 8갑을 삼가드리오니, 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香茗八匣伏呈, 領情伏望耳)”라는 언급이 있다. 이 기록들은 이시헌 당대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월산작설차(月山雀舌茶) 또는 향명의 이름으로 차가 꾸준히 생산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신계의 약속은 100년 이상 지켜졌다. 일본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이 다산의 현손인 정규영(丁奎英·1872~1927)에게 금릉월산차를 대접받은 일을 「차이야기(茶の話)」에 기록하였다. 후사노신이 정규영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정규영의 생몰연대로 보아 후사노신이 경기도 남양주 마재의 여유당을 방문한 것은 1920년대 초반으로, 묵혀두었던 기록을 1931년에 발표한 것이다. 정규영은 금릉월산차가 강진의 다산에서 다산선생의 유덕(遺德)을 경모하여 매년 이른 봄에 강진에서 보내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강진 월출산의 차가 다신계 약속을 100년 이상 지켜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3월 필자와 고전공부를 하는 분들과 백운동 별서정원을 답사했다. 왼쪽 첫 번째가 필자. 사진제공=목압서사
지난 3월 필자와 고전공부를 하는 분들과 백운동 별서정원을 답사했다. 왼쪽 첫 번째가 필자. 사진제공=목압서사

차를 내온 정규영은 “다산의 후학들이 다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매년 차를 보내온다”면서 금릉월산차 상품도장이 찍힌 차를 보여줬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서도, 세상을 뜬 뒤에도, 제자들이 대를 이어 다산의 고손자 대에까지 해마다 차를 덖어 보내준다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스승 다산을 위해 열여덟 제자가 맺었다는 다신계의 약속이 오래 지켜졌음이 확인됐다. 약속은 제자들이 해마다 스승 다산에게 차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는데, 이날 만남에서 제자가 보낸 차가 금릉월산차였음이 처음 확인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뒤 1940년에 출판된 『朝鮮の茶と禪』을 통해 금릉월산차 제조자가 이한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볼 때 이한영이 백운옥판차를 만들기 전에 금릉월산차를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초반 '백운옥판차' 상표를 붙여 유통시킨 이한영. 사진제공=이한영 차문화원
1920년대 초반 '백운옥판차' 상표를 붙여 유통시킨 이한영. 사진제공=이한영 차문화원

차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 박사는 “100년이 지나갈 무렵, 이 약속을 대를 이어 지켜온 사람이 제 고조부인 이한영입니다. 이한영은 어린 시절부터 차를 만들어 다산가에 보내오다 40대 초반 일제강점기를 맞이합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차가 일본의 차로 둔갑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고, 우리 고유의 상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백운동 옥판봉에서 자라는 의미로 ‘백운옥판차’라는 이름을 지어 유통시켰습니다.”

이시헌 가문의 이러한 차문화는 일제강점기 백운동 인근 월남리에 살던 이 집안의 이한영이 만들어 판매한 금릉월산차나 백운옥판차로 그 맥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고, 월산은 월출산을 줄여 말한 것이다. 백운옥판차란 백운동 옥판봉에서 나는 차라는 뜻이다.

이시헌의 5세 손으로 10대 동주인 이효천 옹 또한 생전에 구증구포의 덖음차를 직접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마시곤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들었던 차도 떡차가 아닌 잎차 형태였다.
이현정 박사는 “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1920년대 초반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고양되었고, 또한 1920년대 초반에는 일본회사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선각자들에게는 국산품, 토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이 벌어졌지요.”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어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차의 포장 앞면에는 백운옥판차 상표인을, 뒷면에는 한반도를 꽃문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꽃문양 옆에 쓰인 화제(畫題) ‘白雲一枝 江南春信’은 ‘백운동 한 가닥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으로 해석됩니다. 즉 해방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강진 월출산 아래에 있는 이한영 생가. 사진=조해훈
강진 월출산 아래에 있는 이한영 생가. 사진=조해훈

또 이 박사는 “백운옥판차는 한국 최초의 차상표일 뿐 아니라, 스승 다산 정약용과의 약속을 100년 이상 지켜온 신의의 차이고, 우리 차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지킨 차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한영은 원주 이씨 29대손으로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60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강진군이 2010년 생가를 복원했다.

백운옥판차 등의 이름으로 차를 만들고 있는 이 박사는 “백운옥판차와 금릉월산차, 월산차 3개의 이름을 모 기업이 소유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송을 해 백운옥판차 상표만 찾았습니다.”라며, 백운옥판차 상표를 되찾아온 과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운옥판차 상표를 찾아온 것이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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