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가 있는 저곳의 다섯 특징>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0. 계성과 사라

여긴 갑갑하고 답답한 곳이야. 여기서 2600년도 넘게 지냈다니, 아! 징하다. 나보다 더 오래 있는 자도 있다던데... 더 징하다. 근데 내가 여기서 더 갑갑답답한 이유는 내 후손들과 후예들의 현재상황 때문이야. 그들이 잘 되어야 내가 좀 숨을 쉴텐데… 지금 그들은 아주 아작이 났어. 내가 인류역사 최초로 이룩한 대제국은 아무 의미가 없어. 바보같은 놈들! 어째 통치를 그 따위로 하는지 모르겠어. 이 위대한 선조인 나를 좀 본받아야 할텐데…

어이! 계성씨! 뭘 당신을 본받아. 본받기는… 그대는 어째 여기 들어와서도 철이 안났는가? 인류사 최고의 잔인한 악녀인 나는 철들어서 이제 조신하고 조용해졌는데 니는 어째 왕년 살아생전의 네가 위대하였다느니 어쩌니저쩌니 망상을 떨고 그래. 좀 철 좀 나시오. 계성씨! 넌 머리도 좋고 학식도 많았지만 그저 잔인하고 악독한 권력자에 불과했어. 그 잔인악독함으로 대제국을 이루었겠지. 너의 후손과 후예들이 지금 안좋게 된 것은 나 너의 업보야. 바보야. 알고보면 다 너로부터 인한 것이라구. 너 때문이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했는데. 다 요즘 놈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지. 나만큼 영특하고 강력하고 위대한 군주는 내가 날 판단하기에 없는 거같은데... 너 나에 대해 좀 알고 말하는 거야. 어디 음침하게 생겨가지고 감히 나를 논하고 그래. 건방지게서리. 요망하게... 요망한 년!

니 나보고 년이라고 했어. 이쯤 되면 한판 붙자는 거지. 그래 한번 붙자. 무엄한 놈! 자, 들어와 드루와 이 후진 놈아!

내 원래 성질같아서는 확 붙고 싶은데 내가 여자랑 싸워서 뭐 어쩌라구? 그냥 내가 참지. 내가 잘못했어. 나도 여기서 많이 무던해졌어. 미안해. 너한테 요망한 년이라고 한 말 사과할게.

빨리도 납작 엎드리네. 너 참 현명한 남자네. 남자다워. 나랑 싸워 이겨서 뭘 어쩌겠어. 계성, 네가 그렇게 숙이니 나도 마음이 누그러지네. 사실 난 네가 욕한 대로 요망한 년이 맞아. 나는 살아생전에 아주아주 너무너무 매우매우 무척무척 베리베리 요망한 여자였어. 요망(妖妄) 글자 그대로 요사스럽고 망령되게 살았지. 요망한 년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극악무도했어. 잔인잔혹했어. 그런 나의 잔혹한 악행이 드러났지. 난 극형을 받아야 마땅했지. 나는 나의 죽음을 각오했어. 나의 악행에 가담했던 하인들은 사형에 처해졌지. 그런데 나는 사형이 아니라 금고형에 처해졌어. 하인들은 평민이니까 사형이고, 나는 백작부인 귀족이니까 사형을 면했지. 참 인간세상 불공평해. 나는 악행을 범한 주범인데 괜히 밑에 사람들만 죽게 된 거지. 물론 악행범죄에 가담한 하인들도 주인인 나한테 맞춰주기 위해 잔인했지. 그 잔인함의 정도는 인류역사에서 최악일 거야. 피부미용에 좋다고 나이어린 처녀들이 흘리는 피 목욕을 즐겼지. 이를 위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꼬챙이 기계들을 만든 것도 그 하인들이지. 가장 생생한 예로 과일을 으깨 과즙을 내는 착즙기처럼 처녀들을 으깨 혈즙을 내는 혈즙기를 사용해서 피목욕을 즐겼지. 그래서 나한테는 ‘피의 사라’라는 근사한 별명이 붙었어. 영국에 ‘피의 메리’라고 들어 봤겠지. 피의 메리인 그녀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 로마카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죽였지만 나는 미용적 욕망을 위해 무고한 젊은 처녀들을 죽였으니 피의 사라인 내가 훨씬 더 잔혹했지.

아! 그만... 말하지마 제발! 토 나오려구 한다. 네 말만 들어도! 어떻게 너는 그렇게 얼굴표정 한 번 바뀌지 않고 혈즙기 운운하며 너의 잔혹한 짓을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지. 또 다시 노골적인 욕이 나오려구 하네. 아주 그냥 너라는 년은 개쌍년이었네. 나도 대제국을 다스를 때에[ 주변 나라를 쳐들어 가서는 그 곳 사람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어도 너처럼 잔인하진 않았어. 잔인하더라도 나는 대제슷을 통치하려고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랬어도 너처럼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어. 너는 단지 너의 그 알량한 피부미용을 위해 그랬다는 게 소름돋는다. 너랑 마주하고 있는 내가 떨린다. 나쁜 년같으니라고가 아니라 너는 그냥 나쁜 년이야. 인류사 최악의 나쁜 개쌍년이다.

맞아. 너한테 쌍욕을 들어도 싸. 아까 요망한 년이라고 욕 들을 때는 화가 치밀었는데 지금 개쌍년이란 욕을 들으니 기운이 빠지네. 나도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오로지 나 이뻐지기 위해 나이어린 처녀들을 600명 넘게 죽인 인류사 최학의 연쇄살인범인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악행들이 부풀려지긴 했어도 부풀려질 만했기에 부풀려진 거야. 또 내가 마녀사냥 당했다면서 내가 그렇게 악행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썰도 있지만 그건 아니야. 나의 악행은 당사자 장본인인 내가 젤 잘 알아. 나는 악행을 저지른 게 맞고 나의 악행이 부풀려진 점도 있지만 거의 다 내 악행에 관한 사실들은 변함없어. 피의 목욕을 즐겼다는... 피가 흥건하도록 담긴 욕조에서 목욕을 했다는 사실! 나는 내 별명대로 피의 사라였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피 목욕하는 사라였어. 피 목욕할 때 나는 그 피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까지도 즐겼어.

그만하라고... 또 왜 말해. 구역질나게 토(吐) 나오게... 제발 그만해 줘 사라! 이제 욕도 안나온다. 너란 여자 앞에서...

오직 오로지 자기 피부를 젊게 하려구

처녀들 피를 짜내 피의 목욕을 즐긴 인류역사 최악의 잔혹녀


그래도 내가 지금은 여기 들어와서 반성하고 있어. 그러다 나의 악행을 말하려다 보니 좀 도를 지나치게 잔인하게 말해 미안해.

넌 그냥 나쁜 년이 아니야. 아주아주 흉악하고 잔인하고 이 세상 그 어떤 흉악잔인한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너는 그런 년에 해당되. 그런데 어찌 너같은 년이 여길 들어 왔지.

나 나쁜 년인 줄은 내가 충분히 알겠는데 자꾸 년 년 년 그러니까 신경질 나려고 하네. 살아생전에는 나쁜 년이었지만 지금은 회개하고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는데 자꾸 왜 년년년 그래. 좀 조심해. 너도 나쁜 놈이었잖아. 다른 나라 침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게 너 아니었어? 같은 나쁜 사람들끼리 왜 그래. 자꾸 또 그러면 너한테 놈이라고 할 거야. 나쁜 놈, 놈놈놈! 나는 나쁜 년, 년년년!

아! 왜 그러실까. 우리 휴전하자. 말싸움 그만하자. 여기서 살아생전 일들 가지고 싸우기 싫어. 다만 나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만큼 잔인하진 않았어. 그리고 잔인함의 목적이 달랐지. 난 통치를 위해 잔인해진 거고, 너는 미용을 위해 잔인해진 거잖아. 그래도 네 말 수용해서 내 입에서 ‘년년년’ 하는 건 하지 않을게. 거 참! 말도 시원하게 못하게 되게 뭐라 그러시네. 사라님!

알았어. 휴전 수용할게. 싸우지 말자. 그렇다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은 못하겠네. 너는 너의 잔인함으로 역사에 남았고 나도 나의 잔인함으로 역사에 남았어. 내가 죽고 난 뒤 나는 흡혈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고 나로 인해서 여러 창작물들이 만들어졌어. 아마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을 거야. 이 걸 좋다고 해야하나 안좋다고 해야 하나. 여하간 인간들은 참 희한해. 나를 그렇게나 비난하면서도 그들 창작물의 주인공으로 나를 내세움으로서 나를 숭배하니까? 나를 욕하면서도 나를 추앙하는 꼴이지. 인간은 참 이율배반적 아이러니한 알 수 없는 존재들이야.

맞아. 인간은 악행을 비난하면서도 악행을 교묘하게 추종하기도 해. 선과 악이 뒤죽박죽된 게 인간들 머릿속이야. 도무지 그 속을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없는 존재들이야. 사람들은 피를 무서워 하면서도 피를 즐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사라, 너는 피로 목욕했지만 나 때는 피를 흘리는 피의 스포츠(Bloody sports)가 있었어. 유혈 스포츠지. 사람과 동물이 잔인하게 싸우면서 흘려지는 피를 보는 거지. 인간은 피를 보면 흥분해. 그래서 그런 피의 흥분을 즐기는 건가? 흥분하면 아드레날린이 나온다며... 나는 사냥을 하며 사자를 잔인하게 죽였어. 그리고 그 장면을 부조상으로 남겼지. 유혈이 낭자한 피의 스포츠가 예술이 되었던 거지. 거기서 사자를 죽이는 사람이 바로 나야. 나의 용맹함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걸 조각으로 남기도록 했으니 나도 피를 즐기는 인간이었어.

너도 피를 즐기는 인간이었구나. 사자라는 동물을 죽이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것도 너잖아. 너도 나쁜 놈이었어. 아, 참! 아까 우리 서로 놈놈놈 년년년 안하기로 했지. 미안!

봐줄게. 사라. 나는 수많은 인간들을 학살한 주범이면서도 패배를 몰랐던 정복자였기에 명군으로도 불려. 사람을 그다지도 많이 죽인 내가 명군이라니! 나 살았을 때는 그런 평판이 듣기 좋았는데 여기 들어와서 생각하니 참 웃긴 거야. 나는 그냥 나쁜 놈이야. 아무리 내가 지식이 많고 인류최초의 도서관을 세운 왕이었다고는 해도 나는 사람을 죽인, 그것도 아주 일부러 처참하게 학살해서 저항의 기운을 완전히 뿌리채 밟아 없앤 잔인한 권력자였을 뿐이야.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내가 호화로운 궁전을 만들고 방대한 도서관을 세운 곳은 파괴되었지. 물론 어떤 영국 사람이 발굴해서 나의 영광스런 업적들과 잔인했던 악행들이 알려지긴 했어. 거기 있던 유물들을 자기네 박물관으로 옮졌지. 영국놈들 참 대단해. 그 많은 걸 어떻게 옮겼나 몰라. 그런데 그걸 옮기도록 한 내 후손놈들은 그렇게 자기의 조상인 나의 유물들이 옮겨지는 걸, 그러니까 빼앗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는 게 화가 나. 내가 권력을 누리던 내 터전은 폐허가 되었어. 흙먼지가 휘날리는!

그게 다 너의 업보 아니겠어. 너의 악행에 대한 댓가를 너의 후손들이 고스란히 받는 거겠지. 네가 심어놓은 악행의 유산이 너의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결과로 나타난 거야.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솔직하게 말해서. 결국 나 때문에 내가 이루어 놓은 대제국이 이렇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 땜에 기분이 안좋아. 인류문명의 시원지이자 출발지이고 대제국의 기원인 우리나라가 이렇게 형편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게 허망해. 그런데 화가나 분통하기보다는 내가 원망되 원통(冤痛)해. 내 후손들이 잘 하면 좋겠는데... 그럼 내가 살던 곳은 엄청난 찬란한 관광지가 될텐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보이지가 않아. 지금 이라크에 있는 거긴 관광이 아예 금지된 곳이야. 나 때의 번성이 2500여 년이 지난 후 사라졌어. 근데 애 밖이 소란스러워. 사라! 가만있어봐. 내가 좀 살펴볼게.

박기철 교수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