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6. 기백과 유경

한 나라의 엄연한 왕이었던 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희대의 악마야. 도살자나 학살자라고 불리기도 해. 사실 난 내 손으로 사람 하나 죽인 적도 없는데 그래. 다 아랫 놈들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그런 건데… 그렇다고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모든 책임은 최고경영자였던 내가 지는 게 맞지. 히틀러도 지 손으로 직접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았어도 유대인을 죽인 책임은 다 총통이었던 히틀러한테 있는 거잖아. 그렇게 따진다면 나는 히틀러보다 더 악행을 저지른 나쁜 놈이었어. 나의 무모한 탐욕으로 인해 손발이 잘리기도 하며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나는 사죄해야 해. 사죄로 끝날 일이 아니야. 나는 처벌을 받아야 해. 아직 난 내가 지은 죄로 벌받지 않았지. 무슨 벌을 받더라도 나는 감수해야 해. 감수는 해야 하겠지만 무서워. 무슨 벌을 받을지 무서워.

잠깐! 너 조금 전에 유대인이라고 말했어? 히틀러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나는 유대인이라고 하면 치가 떨려. 유대인은 아주 징한 질긴 년놈들이야. 너도 역사에서 악마라고 평가된다지만 나에 비하면 약과야. 나는 인류사 최악의 악녀로 꼽혀. 그 것도 내 딸이랑 세트로 묶여 인류사 최악의 악질적 모녀로 꼽히지. 히틀러가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 꼽히는 제일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거잖아. 그래도 너는 인류사 최악의 악마로 꼽히지는 않잖아. 왜냐하면 네가 학살한 사람들은 힘없는 흑인들이었잖아. 그런데 유대인들은 강인한 모질긴 민족이야. 유대인은 2차대전 동안에 600여만 명이나 죽고도 전후에 지네들 나라를 세우고 가장 강한 국가가 된 미국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흔드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을 죽였으니 히틀러는 최악의 악마가 된 거지. 나도 히틀러랑 마찬가지야. 유대인을 죽인 죄로 나는 인류사 최악의 악녀가 되었어. 나 말고도 악독한 년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나야? 내가 보기엔 다 유대인들의 농간이 아닐 수 없어. 농간(弄奸)까지는 아니라면 그들의 교묘한 전략적 계략이야. 하도 힘이 세니까 그들의 주장이 국제사회에서 그대로 먹히는 것이지.

유경, 네 말이 일리가 있게 들리네. 인류사 최악의 악마는 어찌 보면 히틀러보다는 나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죽인 흑인들은 지금 저 아래 세상의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야.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르지. 콧수염 사나이 히틀러의 적이었던 콧수염 사나이 스탈린은 히틀러보다 더한 악마야. 히틀러는 자기네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한다는 공적 명분으로 이민족인 유대인 6백만명이나 죽였지만 스탈린은 자기 개인의 사적 권력을 위해 동족인 소련사람들을 천만명 가까이 죽였어. 우크라이나 사람들도 8백만명이나 굶겨 죽였어. 유대인들이 죽은 홀로코스트보다 잔혹했던 홀로도모르야. 과연 누가 더 악마일까? 말할 필요도 없어. 히틀러보다 스탈린이 더 악독해. 하지만 스탈린은 최악의 악마로 불리지 않아. 왜 죽인 사람들의 후예가 힘없는 사람들이거든. 유대인들보다 힘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너! 나랑 말이 좀 통할 거같네. 나는 나봇이라는 유대인 한 명의 포도원을 빼앗고 유대인 선지자 한 명과 영적 대결했다는 사실만으로 인류사 최악의 악녀가 되었어. 영적 대결에서 우리는 지게 되는데, 이 때 유대인 선지자의 패거리들은 우리 쪽 사람들을 수백 명이나 죽였어. 또 그 놈들은 나를 높은 건물에서 던져서 처참하게 죽였어. 유대인들 입장에서라면 나는 죽음이라는 죗값을 톡톡히 치루었는데도 나는 최악의 악녀가 되었어. 도대체 이런 역사적 평가는 누가 하는 거야? 나는 도무지 수긍할 수 없어. 엄마의 이런 꼴을 본 내 딸도 아랫 나라로 시집가서 안좋은 짓을 벌였지만 그 아이도 결국은 나처럼 유대인의 손에 죽고 말아. 죄값을 치루었다면 치룬 거지. 뭐 유대인들한테 우리 모녀가 악녀라고 하는 건 뭐 그렇다고 쳐. 그렇지만 인류사 최악의 모녀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역사적 평가가 아닐 수 없어. 나는 이 억울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받고 싶어. 그래봤자 별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하도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지금 유대인들 파워가 하도 세서 내 주장은 먹히지도 않을 거야. 그냥 여기서 조용히 있다가 여기서 뭐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더 있겠어. 너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지내? 여긴 최종적 목적지인 저승은 아닌 거같고…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거같은데… 아무래도 중간계 같아.

뭔 생각이 필요해. 그냥 그저 그렇게 그러려니 그런가보다 하면서 지내는 거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억울해 하고 그러지마. 생각하지마. 뭘 판단하려고 해. 여기서 무슨… 다 소용없어. 쓸데없어. 기다리지도 마. 그냥 있어. 이렇게 나랑 대화 이야기 나누는 건 괜찮아. 그런데 말하다 보면 감정이 격렬해질 수도 있는데 감정관리나 잘 해. 그게 여기선 최고의 처세야. 처세술이나 처세법은 아니더라도… 혹시 네 딸도 여기 어디 있는 거 아니야. 만날 수 있으면 서로 억울해 하며 분노하지도 말며 그냥 서로 위로나 해.

글쎄, 그러고는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을려나 몰라. 그래도 내 불쌍한 딸을 꼭 만나고 싶어. 이 못난 어미 때문에 모질게 살다 죽은 애처러운 애야. 여기서 만날 수 없다면 지옥에나 가진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천국에 갔을 거같지는 않아. 그래도 몰라! 내가 천국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 딸한테는 꿈이라고 꾸고싶어. 인류사 최악의 모녀라는 악명은 듣고싶지 않지만 어쩌겠어. 내 마음은 복잡해. 답답갑갑해. 이런 심정을 이런 짧은 글로 표현하고 싶어. 결코 아름다운 시는 아니야. 슬픈 시!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이런 시가 있던데 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인간이야.

사람이 모가지가 길면 멧집이 없어 싸움을 못한다던데.

한 방에 훅 간다더군.

권투선수하려면 모가지가 굵고 짧아야 한다더군.

여자들 중에서도 난 모가지가 가늘고 긴 편이었어.

그래서인지 난 아무리 여왕이더라도 멧집이 없었나봐.

저 드센 놈들이 날 공격해 왔을 때 난 대책없이 무너졌어.

결국 저 그악한 놈들은 날 높은 데서 떨어뜨려 날 죽였지.

난 모가지가 굵고 짧아야 했어.

그랬다면 난 저 놈들한테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나만 당했다면 괜찮은데 내 딸까지 당했으니.

그 아이도 나처럼 모가지가 가늘고 길었지.

그런데 나와 내 딸을 그렇게 죽인 년놈들의 후예들은

지금 떵떵거리며 국제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어.

남들은 그게 음모론이라는데 엄연한 사실론이야.

그러니 잔혹하게 죽은 나와 내 딸은 그 년놈들의

위세에 눌려 인류사 최악모녀가 되고 말았어.

우리보다 더 악독한 년들이 얼마나 많았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난 그냥 그렇게 그러려니 그러나보다 해.

그 년놈들의 위세가 꺾어야 신원(伸冤)이 될 텐데.

아무래도 상당기간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같아.

다만 앞으로 천국은 못가더라도 지옥엔 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나마 너보다 사정이 낫은 게 너처럼 인류사 최악이라는 치욕스런 불명예 타이틀이 나한테는 붙지 않았어. 그냥 난 희대의 도살자, 학살자라고 불리지. 사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악독했던 놈이었는데도 말이야. 난 힘없는 흑인을 건드렸고 넌 지금 저 아래 세상에서 힘 있어진 막강한 유대인을 건드렸기 때문일 거야.

인간세상은 참 불공평해. 물론 공평한 세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인류사 최악을 거론하며 나를, 그리고 내 딸까지 모욕하는 건 불공평해. 어차피 승자가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거라지만 나는 불편해. 내가 겪어야 하는 치욕이 불편하지.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난 견디고 있어. 도대체 어찌 해결할 도리나 방법 수단이 없기 때문이야. 그렇게 나는 무기력해지며 인내하고 있어. 너는 나처럼 인류사 최악이라는 타이틀은 안가졌지만 나쁜 놈이었더건 맞으니까 나보다는 덜 괴로울 거야.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여기서 지내고 있어? 그래도 괴로울텐데.

나는 괴로워도 다 모두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회개하며 살고 있어. 나보고 건축왕이니 초콜렛왕이니 하면서 날 칭찬하기도 하지만 다 부질없어. 난 히틀러보다 수백만명을 더 죽인 악독악랄악질의 인간이었어. 아무리 내가 왕이었어도 난 아주매우무척너무 나쁜 놈이었어. 흑인들이 벌어다 준 엄청난 돈으로 흥청망청 쓰면서 띵까띵까 이곳저곳 많은 예쁜 애인들을 데리고 살았지만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악한이었어. 돈많은 악한! 쓰레기였지.

그렇다고 너를 비난하지마. 너 아니어도 너같은 자리에 있으면 너처럼 할 놈들이 안할 놈들보다 훨씬 많아.

그럴까? 근데 나는 이 분한테는 늘 미안 죄송해. 괜히 나랑 이름이 같아가지고 사람들이 혼동하는데 이 분은 훌륭한 분이셨어.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야. 나한테 내 삶을 온전히 되돌아 보게 하는 분이시지. 괜히 나랑 이름이 같으셔서 미안한 분이야.

Leopold Ⅱ 1747~1792,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 분과 동명이인인 나는 악랄악독한 나쁜 놈이었지만 이 분은 나랑 전혀 완전히 달라. 나와 달리 후세에 좋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지. 1765년 이 분의 형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을 때 이 분은 아버지의 영토였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 받았어. 18세 때야. 이 때부터 그의 선한 통치가 시작되었지. 하수도 정비와 같은 공공사업을 벌였고 세제를 개선했으며 군대를 양성했고 산업을 부흥시켰지. 체벌과 같은 구습을 타파하며 비인도적 관습을 금지했고 개인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었어.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회복지와 공중위생을 위한 보건의료 제도도 실천했지. 이런 발전과는 별개로 주민들로부터는 외지인이라며 인기가 없었고 교황 세력과 충돌하기도 했어. 이 때 자기 나라의 안보를 위해 비밀경찰을 운영하기도 했다지. 그런데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이듬 해인 1790년에 형이 사망하자 황제 선거에서 형의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지. 신성로마제국이란 게 신성하지도 않고 순수한 로마도 아니고 강력한 제국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가장 큰 대국이었어. 그는 황제였던 형의 실정을 만회하는데 주력했어. 이 와중에 그 분이 가졌던 평소의 신념과 어긋나는 현실주의적 조치를 채택하기도 했어. 혁명의 기운이 불같이 솟던 프랑스와는 선을 그었지. 그런데 황제 재위 2년만에 45세 때 갑자기 서거하셨어. 음로론일지 모를 독살설인지 암살설인지 확실치는 않아. 소박하면서도 성실한 성품과 온전하면서도 분명한 생각을 가졌었던 이 분이 더 오래 재위하여 통치하였다면 역사는 아마도 더 선한 더 좋은 방향으로 흘렀을 거야. 확실해.

네가 존경할 만하신 분이네. 훌륭한 황제였네. 기백이 너는 이 분 반에 반만이라도 따라가면 좋았을텐데. 넌 어째 희대의 학살자가 되었니? 그냥 이 분을 존경만해. 변명하지마. 넌 그냥 나쁜 놈이야. 어! 근데 바깥 분위기가 좀 쌔한데. 갑자기 왜 그러지?

박기철 교수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