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이 우주의 중심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특별한 그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지구의 인류는 다른 생명체나 무생물보다 존귀한 존재일까? 나아가 우주는 인간을 위해 설계된 것일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어떤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신(하늘)-천사-인간-동물-식물-무생물. 이 전통적인 자연의 위계는 우주 만물이 하나의 연속체 속에 자리 잡으며, 모든 존재가 특정한 본질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체계는 고대 및 중세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후계자들이 발전시킨 사상에서 두드러진다.

자연의 위계라는 ‘믿음’은 현대에까지 깊이 영향을 끼쳐, 지금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를 인정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양의 ‘하늘 숭배’ 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지성의 체계적인 발달 기간은 일천하다. 곧 전통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실증적·비판적 사고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근세 과학혁명 때이다. 멀리 잡아도 500년 남짓의 기간에 불과하다.

물론 500년 전 과학혁명은 과학적 사고가 시작된 시기로 중요한 전환점이지만, 실제로 인간 지성의 발전은 고대 그리스 철학, 중세 스콜라 철학, 그리고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같은 더 오래된 전통들의 누적 위에 세워진 결과이다.

따라서 급격한 전환점으로 과학혁명을 강조하더라도, 그 기반에는 수천 년간의 사유와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성 발전의 흐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각다운 생각을 한 지는 수천 년 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차치하고 지구 생명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인간’의 역사는 보잘 것 없기 짝이 없다. 35억 년 전에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했다. 600만 년 전에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에서 인간이 독자적 진화를 시작했다. 20만 년 전에 현생 인류, 곧 현재 우리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

‘현재의 나’의 존재 의미를 따지기 위해서는 족보를 넘어 더 근본적인 ‘생명’의 뿌리까지 천착해 보면 더 좋지 않을까? 현재 인류 지성이 협업한 결과에 따르면, 곧 과학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과학(혹은 과학적 주장)은 비판에 열려 있고, 검증이 가능하다. 과학의 영역에서 ‘사실’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며 시험에 열려있다. 그 시험에서 아직 거부당하지 않은 주장은 잠정적으로 과학적 사실이다. 더하여 어떤 주장이 잠정적인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것으로 입증되면, 그 주장은 사실로 여겨진다. 진화론이 그렇다.

현대 과학, 진화론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진화계통수(進化系統樹. Phylogenetic Tree, Evolutionary Tree)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진화계통수의 맨 위에는 과학자들이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줄여서 루카(LUCA)라 부르는 존재가 있다. 루카는 모든 생명체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라 불렀을 뿐 성별은 없다. 우리를 비롯해 현존하는 모든 균류, 식물, 세균, 동물은 루카의 후손이다.

따라서 당연히 모든 생명체가 루카의 핵심 특성을 공유한다. DNA, 단백질 합성, 지질, 탄수화물 등이 그 특성에 해당한다. 루카는 지금 살아남은 세균보다 더 단순한 형태였고, 35억 년 전에 살았다. 그러므로 ‘나’란 존재는 세균보다 더 단순한, 혹은 감정적으로 표현하면 세균보다 더 못한 존재의 후손이라는, 쉬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참조, 맥스 베넷/『지능의 기원』)

자연의 위계라는 전통적 관점은 흔히 “위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 불린다. 신(하늘)-천사-인간-동물-식물-무생물. 신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신은 변화하지 않고 완전한 존재로서, 만물의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천사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감각이나 물질적 한계를 초월한 순수한 정신적 실체로서, 신의 뜻과 질서를 온전히 이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지구상의 생물들 중에는 인간이 가장 꼭대기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생물의 형태는 신이 정해 두었다. 그리고 모든 생물에는 ‘최종 원인’이 있으며, 제각기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다. 곧, 생명의 형태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이 정해 두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변치 않는다.

따라서 진화는 혁명적 생각이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의 위계라는 전통적 믿음을 완전히 전복했다. 더구나 진화론에서는 신이 설 자리가 없다. ‘자연선택’이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 당연히 천사도 없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과 식물의 우열을 따지지도 않는다. 각자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가장 적응하도록 진화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위계라는 전통적 믿음을 따를 경우, 저 소나무나 개·돼지·소보다는 우월하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감정이야 어떠하든 소나무와 개와 돼지와 소와 내가 동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지만, 선택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게 있다.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과 삶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위상이 개, 돼지보다 높다고 해서 삶의 의미가 있게 되고, 개와 돼지와 동격이라고 해서 인간의 삶이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나 이론물리학자 스티브 호킹, 그리고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의 논리이며 이론이며 신념이다. 이들의 설명을 논리 정연히 글로 옮기는 작업이 쉽지 않다. 깜냥껏 옮겨보려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내용이 아니라, 서문 앞 페이지 빈 면지에 떡 박혀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였다.

앤 드류언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이보다 더 멋진 연애편지나 더 감동적인 사랑 고백을 본 적도, 들은 적도, 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광대한 우주와 무한한 시간 속의 티끌만도 못한 존재임을 자각한 겸손 때문일까?

아니다. 그러나 이미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이유를.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