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뜻밖의 귀촌(5)
거의 매일 올라가는 등말리의 산비알에 노란 생강꽃에 이어 분홍빛 진달래도 피다 지고 어느 듯 찐득찐득한 진액이 묻어나는 철쭉도 피었다. 참꽃으로 불리는 진달래가 상큼한 봄 향기와 함께 또 한 해 봄을 맞이하는 설렘과 기대를 불러온다면 개 꽃으로 불리는 철쭉은 자줏빛이 섞인 짙은 색깔과 끈적끈적한 진액, 그리고 무엇보다 먹을 수 없다는 점이 항상 배가 고픈 촌아이들에게 뭔가 못 마땅하고 정이 가지 않아 소를 먹이거나 밭으로 가다 도랑가나 둑에서 발견하면 괜히 기분이 찜찜해서 퇘, 침을 받곤 했다.
그렇게 뭔가 늘 찜찜한 개 꽃처럼 등말리의 분위기도 뭔가 개운치가 못 하고 불편했다. 건축허가는 물론 산림형상변경 등 땅을 파고 집을 짓을 기본 절차가 도무지 이행되지 않는 것이었다.
열찬씨가 건축사에게 두어 번 전화를 하니 곧 모든 허가가 동시에 떨어질 것이라는 대답뿐이었다. 어떤 때는 직선으로 한 400미터 떨어진 군(郡)지정 기념물 명촌 김씨네의 종가집 만정헌때문에 심의가 늦어져 허가가 지연된다는 변명도 늘어놓았다. 하도 답답해서 14층의 박태국과장을 통해 울주군 건축과에 알아보니 어떤 허가도 아직 접수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허가가 접수되어야 부서 간에 협조를 요청할 <문화재지역 건축허가심의>가 착수될 텐데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는 심의절차를 핑계로 허가절차를 착수조차 않고 마냥 미루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냥 한가롭게 미루기만 하는 설계사 안병도씨의 입장과 달리 등말리에 집을 지으려는 네 가구의 사정은 점점 급박해갔다. 열찬씨는 기껏 남이 다 심은 고추를 심지 못 하고 한해가 넘어간다는 정도에다 부산에서 언양까지 돈 들고 시간 들고 몸 피로하면서 오가는 정도의 피해라기보다는 불편이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사정은 달랐다. 우선 생질녀 현주씨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현주와 딸 은진이가 먼저 울산시내에 단간 셋방을 얻어 먼저 내려온 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집을 지으려는 유서방까지 내려와 좁은 단간 방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다 곧 건축허가가 난다는 말에 방을 내 놓은 것이 금방 나가버리니 우선 거처할 곳이 문제였다.
울산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공업도시가 되어 인구가 밀려들면서 평생 셋방을 놓아 방세로만 살아오던 영악한 노파가 당장 집을 비우라, 안 비우면 법원에 소송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 내던 월세에 위약금을 배로 더 내라고 압박해 울며 겨자 먹기로 위약금까지 물게 되어 덩치가 크고 성격이 단순한 유서방이 내용을 알아보거나 뭘 해결하려기보다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이 모양이야?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
하며 아내를 바라보면
“무슨 남자가 그래? 답답하면 직접 나서서 좀 알아나 보지.”
4명의 오빠들 틈에서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 수진씨로 부터 ‘우리 공주’ 또는 ‘박양’으로 불리며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탓으로 성격이 되바라져 앙발고로 불리는 현주씨가 도로 면박을 주면
“내가 나서면 안 돼. 내가 나서면 자칫 사람이 다쳐!”
자기는 평소에 자잘한 일에 신경을 잘 안 쓰지만 만약 시비가 벌어지면 욱하는 성격 때문에 단숨에 상대를 패대기치거나 박살내 자칫 큰 사건이 날지 모른다며 괜히 주먹을 쥐고 어깨를 으쓱대며 상 남자 흉내를 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복잡한 일에 끼어드는 일이 성가신 모양으로 제 성질을 못 이겨 발을 동동 구르는 현주씨를 외면하고 러닝바람으로 낮잠을 자는 데만 열중하는 걸 짐작 못한 현주씨가 아니었지만 그만 픽 웃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심각한 사람은 박장로의 처남 성일씨의 친구 김기연이라는 중장비기사였다. 원래 성일씨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일자리가 거의 없는 가난한 전라도에서 공단인 울산으로 흘러들어온 사람이었다. 그의 두 누나중하나인 천선초라는 이름의 해뜩한 얼굴에 인사성이 밝고 웃기를 좋아하는 아가씨가 역시 농공단지에 다니는 일식씨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홀어머니가 사는 고향에서는 공부는커녕 밥걱정도 놓기 힘든 고향을 버리고 두 누나가 있는 울산으로 흘러들어온 사춘기의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향산에서 농사를 짓는 제법 잘 사는 토박이 농부에게 시집간 큰 누나이자 일식씨의 처형에게 의탁해 상북중학교에 다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보호자인 큰 누나가 교통사고로 죽고 매형이 재혼을 할 형편이 되자 더는 붙어있지는 못 하고 당시 삼성전관이란 대기업에 다니며 형편이 좋은 둘째 매형 일식씨에게 의탁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성일씨와 동갑 중학생 현주는 아버지 수진씨가 죽고 위의 오빠 셋이 독립해나가고 막내오빠 성식이와 둘이서 등말리의 옛집을 헐고 조그만 슬레이트집을 지어 사는 어머니금찬씨와 셋이 살았다. 주말에 가끔씩 가는 작천정지나 수남마을의 대진아파트에 사는 큰오빠 일식씨의 집에 가면 대기업에 다니는 만큼 집도 잘 꾸미고 올케의 옷이랑 화장품이 비까번쩍하고 동갑짜리 사형인 성일이까지 얼굴에 기름기가 잘잘 흐르고 옷과 가방과 운동화가 모조리 메이커가 있는 고가품인데 비해 명촌에서 엄마 밑에 사는 자신은 무엇 하나 메이커제품을 살 수도 없고 수중에 차비도 없어 학교가 있는 산전리는 물론 언양읍까지 걸어 다닐 경우가 많았다. 돈은 우리 오빠가 버는데 용돈은 왜 사돈인 성일이만 주고 자신에게 안 주는지 올케는 물론 오빠 일식씨에게까지 불만이 많았지만 올케나 오빠 또 당사자인 성일이는 그냥 모른 척했다.
거기다가 현주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날벼락 같은 큰 충격을 경험했는데 그건 등말리의 외딴집에서 엄마와 같이 살던 오누이 중의 오빠인 성식이가 방위근무를 마치고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술이 떡이 되어 새로 만든 언양톨게이터 근방 경부고속도로에 올라가 화물차에 깔려 즉사를 한 일이었다. 한 탯줄에 연달아 태어난 4형제의 막내로 하필이면 외삼촌 열찬씨를 제일 많이 닮아 아버지 수진씨로부터 ‘이제 우리 집에도 비록 천재나 수재는 못 되더라도 공부하나는 걱정 없는 머리 좋은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고 기대를 받았으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공부에는 전혀 취미가 없고 대신 축구와 달리기, 친구사귀기와 주먹자랑에 뛰어나 고등학생이 되자 상북고등학교 최고의 축구선수에 태권도유단자로 불리며저들끼리 어깨라고 부르는 또래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사지가 멀쩡하다 못해 상북면에선 최고의 주먹으로 알아주는 청년이 한 순간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자 명촌리는 물론 상북면과 언양장터에 까지 별별 소문이 다 번졌는데 그 중의 하나는 지난해에 돌아간 제 아버지 박수진씨가 네 아들 중에 제일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심부름을 잘 하던 넷째를 옆에 두려고 데려갔다는 말이었다.
또 술이 취해 어릴 때 놀러가던 버든의 외갓집에 가려다 통행로인 박스를 못 찾고 바로 도로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나 그 때 버든에는 이미 외할머니 명촌댁도 영주로 떠나고 아무도 살지 않을 때라 이치에 닿는 말이 아니었다. 그 밖에 근무를 마시고 돌아오다 술과 함께 부탄가스를 마셨다는 소문과 또 주먹자랑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집단구타를 당해 죽은 사람을 고속도로위에 방치해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별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과 함께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이야기였다.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 두고 밭농사도 흥미를 잃어 금방 캍치못 위의 밭둑에 호미를 던지고
“아이구, 식아, 식아, 성식아!”
를 외치며 날마다 눈에 눈물이 그득한 어미를 찾아가
“엄마, 이라면 안 된다. 내러가서 밥묵자. 오빠는 존데 갔을 끼다.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딸 현주가 달래면
“그래, 니를 봐서도 살아야지. 너거 아부지가 박양, 박양, 우리 박양!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니를 봐서도 내가 살아야지.”
하고 돌아와 모녀가 밥을 먹다가도
“아이고, 성식아! 니는 내가 담은 열무짐치를 그래도 좋아하더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갈 시금털털 감치는 국물을 낭창낭창하게 담은 열무짐치 한 사발이면 무시는 건져서 밥에 얹어 묵고 남은 국물은 밥을 말아 묵고... 그래 식아, 식아, 니가 엄마 열무짐치 한번 담아달라는 말을 내가 여사로 듣고 다음에 천천히 담아준다 캤는데, 세상에 출근하기 전에 열무짐치 담아도라는 말이 니 마지막 말이었구나. 생때같은 목숨이 그래 쉽게 갈 줄 누가 알았노? 아이구, 식아, 우리 성식아!”
제 살아온 세월이 힘이 들어서 그런지 원래 눈물과 한탄을 타고 나서 넋두리가 찰진 건지 아니면 어릴 적 겨울밤만 되면 듣던 아버지 명촌가손의 긴소리가락에 젖어서인지 금찬씨는 조그만 일에도 늘 눈물을 질금거리며 울기도 잘 하고 무어라 중얼거리는 한탄도 구성지고 금방 목소리도 늘 울먹거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했는데 이제 해를 걸러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으니 그 탄식의 구성지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현주 역시 평소에 자기를 끼고 살기는 해도 이미 수십 년 병을 앓아 시난고난 하던 아버지가 죽을 때는 4명의 오빠 틈에서 그렇게 슬픈지도 모르고 넘어갔는데 늘 자기를 보살피는 살가운 오빠이다가 어떤 때는 남학생과 이야기를 한다고 무섭게 다그치던 호랑이오빠, 그것도 두 살 많은 아시오빠가 죽자 그 충격이 아버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나이가 열여덟이나 되니 자연스레 또래들과 어울려 남학생이나 길에서 만난 사내들이 눈길이나 행동을 흉내 내며 낄낄거리기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면서 유난히 자신에게 친절한 시내버스기사, 인물이 훤한 총각기사에게 마음이 뺏겨 한번 씩 만나기도 했는데 그 기사가 나중에 우경이와 은재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안서방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후에 소다를 듬뿍 넣은 밀가루 반죽에 골안 밭에서 딴 자주 빛 양대를 드문드문 넣고 밀떡을 찐 금찬씨가 요즘 유독 하교시간이 늦어지고 가끔 친구 집에 잔다면서 집에도 들어오지 않는 현주를 기다리다 말고 소반에 열무김치 한 사발과 함께 밀떡을 담아 한 입을 베어 물다 또 금방 두 눈에 눈물이 흥건해지며
“아이구, 식아, 식아, 우리 성식아, 오늘은 니 좋아하는 밀떡도 찌고 열무짐치도 이래 잘 익었는데. 포실포실한 밀떡에 시굼털털란 이 열무짐치를 니가 얼매나 좋아하는데 나는 마 목이 메어서 못 묵겠다.”
상에다 도로 밀떡을 놓고 벽에 걸린 남편 수진씨의 사진을 보며
“이 무심한 박수진, 개떡 같은 양반아, 진짜 당신이 우리 성식이를 데꼬 갔나? 당신은 아들 너이 중에 하나쯤 당신이 데꼬 가면 안 될 끼 뭐고 싶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데 있다고 그래 참혹한 짓을 한단 말이가, 아이구 우리 식아, 성식아!”
하며 사진을 쥐어 박는데
“어머니 계시는가요?”
누가 미닫이문을 열며 얼굴을 들이미는데 넓은 어깨와 둥근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말자
“성식아, 니가 성식이 맞제?”
반색을 하며 일어나 온몸으로 끌어안으려는데
“어머니, 사돈 어머니. 저 성일인데요.”
조심스레 떼어내는 총각의 목소리에 전라도사투리의 억양이 가득한데도
“그래. 안다. 아무 말 하지마라. 나는 니가 아무 말 안 해도 우리 성식인줄 안다.”
하며 들러붙는 금찬씨를 간신히 떼어놓고
“저 성일인데요. 매형이 현주 등록금하고 사돈 어머니, 아니 사부인 용돈 주는 걸 가져 왔어요.”
하는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며
“그래 성일이구나. 그런데 덩치도 냄새도 우째 우리 성식이를 그래 닮았노?”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명색 사돈붙이라 옷매무시를 고치는데
“성식이형님, 아니 사형이 죽어서 몹시 섭섭하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출출할 긴데 성식이 니 이 밀떡 좀 묵어라.”
자기자식들 보다 오히려 나이가 작아 평소에도 자식처럼 대하던 처지라 새로 수저를 가져 와
“목매이면 짐칫국물하고 같이 묵어라. 아이고, 우리 성식이가 저 밀떡 하고 열무짐치를 얼매나 좋아했는데...”
“또 눈물을 흘리시네. 그만 우세요. 운다고 성식이형님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하면서 금방 밀떡과 열무김치를 말끔히 비워낸 성일이를 보며
“아이구, 먹성도 좋제? 묵는 것도 우째 우리 성식이를 그래 닮았노? 그래 밀떡 좀 더 가오까?”
“아닙니다. 이제 비도 좀 그치고 하니 가야지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저만치 논길을 걸어가는 성일씨가 사광리 버스정류소앞에서 새파란 대숲에 녹아들어 형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
“내가 헛것을 봤나? 틀림없이 우리 성식이가 왔다 갔는데...”
하고 또 눈물을 질금거리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 이후로 금찬씨는 성일씨를 만나면
“아이구, 우리 이들! 성일이 니가 우리 성식이 대신 내한테 왔구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아들을 대신 보내 주셔서.”
반색을 하며 무언가 먹여 보내려고 애를 썼고 아들내외를 만나면
“요새 성일이는 와 자주 안 오노? 하느님이 우리 성식이대신 성일이를 보내줘서 정말 대택(大德)이다, 은혜로다.”
하며 다음엔 꼭 데리고 오라고 당부하곤 했다. 평소 돈은 제 오빠가 벌고 용돈이나 메이커 있는 옷이나 신발은 엉뚱한 성일이가 누린다고 은근히 반감이 많은 현주가 제 어미가 하는 모양을 보고 그만 부아가 치밀어 하루는 등말리에 놀러온 동갑짜리 성일이를 보고
“야, 성일이 이 똥강아지야!”
눈을 흘기며 바라보자
“현주 니 왜 그러는데? 우리 사돈사이야.”
“사돈 좋아하네?”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나고 같이 감이나 밤을 따러 다닌 일도 많아 아무 스스럼이 없는지라
“똥강아지 같은 니가 우째 우리 성식이오빠야? 나는 니가 우리엄마한테 성식이라고 사랑을 받는 꼴이 앵꼽어죽겠다.”
“앵꼽다는 말이 뭐꼬?”
“멸치젓에 티가 일어서 구물구물 기어가는 것처럼 고일받다 말이지.”
“고일받다는 또 뭔데?”
“징그럽고 아니꼽고 뭐 토하고 싶고 좌우지간 앵꼽은 기다.”
“그래서?”
“니 한번만 더 우리엄마 앞에서 아들행세 하면 죽는다!”
“아이구, 무서워라. 우리 사돈처녀 여자깡패 박현주!”
하며 너나 돌이로 지냈는데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어도 여전했다. 거기다 성일씨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절친한 친구 기연씨와도 셋이 동갑이라는 이유로 가끔 셋이서 술집에 가서
“성일이사돈이고 사돈친구고 요 존만한 머시마들아?”
명색 상북바닥, 언양바닥에서 좀 놀았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며 양껏 술을 마신 현주씨가 인사불성이 되면 둘이 양측 겨드랑이를 끼고 데려다주기가 일쑤였다.
그 기연씨는 집이 되면 이사를 하려고 교동리의 아파트를 내어놓은 것이 벌써 팔려 어쩔 수 없이 몇 달간 임시거처로 옮겨야 할 판이라고 했고 울산에서 보험회사에 다니는 성일씨도 전원주택의 꿈을 접어야할 판이 된 것이었다. 한 골짝에 집을 짓고 평생친구로 지내려던 세 동갑친구들에게 동시에 위기가 닥친 셈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