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제8부 고향에 찾아와도

1. 뜻밖의 귀촌(1)

이제 오리농장에도 갈 일이 없고 아직 명촌의 새 땅도 여전히 대나무가 점령한 황무지로 남아있으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어서 대나무를 베어내고 바닥을 정리하고 측량말뚝을 박아 어디서 어디까지가 내 땅이고 어느 방향으로 집을 앉히고 화단과 밭뙈기는 어떻게 구획을 짓고 우선 한 20평 텃밭부터 일구어 상추와 쑥갓 같은 봄채소를 심고 이어 열무와 고추를 심을 계획을 세우련만 지금은 힘들게 현장에 가도 어디서 어디까지가 내 땅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택지개발명의자로 된 전 지주 장영희씨에게 전화해 왜 이렇게 택지조성이 지지부진한지, 건축허가절차는 제대로 진행이 되고 있는지 물어보면 그건 노련한 설계사 안병도씨가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며 아주 성가신 뉘앙스를 풍겼다.

대지와 전으로 되어있는 자신의 땅은 대를 다 베어내고 땅만 고르면 집도 짓고 농사도 지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윗부분인 산16-1번지 300여 평의 대밭의 대를 완전히 베어내고 이어 자신의 땅의 대까지 베어내어야 하는 모양인데 땅을 사기전 큰 생질 박장로가 며칠 톱을 들고 드나든 이후 그대로 방치되는 걸 보면 아직 나무를 베어내는 벌채허가나 임야를 대지로 바꾸는 형질변경하가도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대밭자리 임야의 소유주가 누구기에 그렇게 방치하느냐고 물으니 하필이면 생질 박장로의 처남과 처남의 친구였다.

택지개발을 처음 시도하던 당시 아는 사람에게 땅을 좀 팔아달라는 장영희씨의 부탁을 받고 박장로가 처남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다 160평에 30만원씩 5천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나중에 전원주택을 짓자는 갓 마흔 살의 두 젊은이가 재미삼아 산 것이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지금 개발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별관심도 없고 또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서 이 골짝에 건축이 가능하게 되면 자기들도 집을 짓든지 비싸게 땅을 팔 심산이라 전혀 급하거나 답답할 일이 없었다.

거기에다 작년추석 칼치 못에 산책을 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대밭을 베어내고 벌건 황토언덕이 드러나게 택지를 조성한 한 300평의 언덕도 그 땅을 산 울산에 사는 임사장이란 사람이 당장 집을 지을 것도 아니면서 재미삼아 건축허가신청을 내서 덜렁 허가가 났는데 아직 집을 지을 구체적 계획이나 건축비도 없어 그냥 착공기한인 1년이 지나 허가가 취소되면서 형질변경한 부분의 원상회복, 다시 원래의 임상(林相)을 회복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조경을 하도록 군청의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래쪽 진입로를 물고 있는 도자기 집에서 도로도 없는 그곳에 어찌 건축허가가 나느냐고 군청에다 집요하게 민원을 넣어 이젠 신규건축허가가 나기 어려운 입장인데 행정공무원을 오래 한 열찬씨가 대지를 사 들어옴으로서 어쩌면 신규건축허가가 가능할지 모른다고, 분할된 땅을 산 지주들은 물론 명색 택지개발자로서 아직 천 평 가까운 땅을 소유한 장영희씨 측도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개발행위보다는 열찬씨의 손에서 무언가 이루어지고 일대에 건축허가가 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하도 답답해 장영희씨에게 전화를 해 도대체 택지개발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지, 토지형질변경은 난 건지 물어보면 그런 건 설계사무소 안병도씨가 안다고 꼭 남의 일처럼 말하는 것이었고 명색 지주에 개발행위지가 그것도 모르고 신경도 안 쓰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따지니 엉뚱하게 전에 계약서를 쓰던 날 장여사 옆에서 무슨 조직의 보스처럼 무게를 잡고 앉아 눈짓으로 모든 걸 지시하던 그 뚱뚱한 김여사란 여자가 전화를 받아 우리가 땅을 여러 곳에 개발해 팔아보았지만 선생님처럼 깐깐하게 모든 걸 따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오히려 신경질을 내면서 다 때가 되면 설계사무소에서 알아서 할 테니 기다려보라는 대답이었다.

내가 없는 돈을 들여 이 땅을 산 것은 태어난 고향마을에 가깝고 누님집이 있는데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운동사마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려 들어오기 위함인데 이러다 올해 안에 집을 짓기는커녕 텃밭에 상추씨 한 줌 못 뿌려보겠다고 볼멘소리를 하자 우리가 선생님한테 턱없이 싼 값으로 전체부지의 노른자위이자 제일 등급이 높은 땅을 판 것은 군청이나 다름없는 구청의 높은 사람출신이라 쉽게 건축허가를 내줄 것이라고 믿고 팔았는데 무얼 하나 도와주기는커녕 깐깐하게 따지기만 한다고 난리였다.

아니, 내가 도움이 되려면 땅을 판 장여사나 건축허가를 맡은 설계사무소에서 일의 진도가 어느 정돈데 어떤 문제를 어떻게 도와달라고 이야기조차 없으니 이건 아예 길을 내고 땅을 쪼개어 팔아먹기만 할 뿐 그 다음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하니까 지금 바빠서 부득이 전화를 끊는다며 뚝 끊어버렸다.

하도 답답해 땅을 소개한 박장로에게 전화를 해보니 이것 참 골치 아프다고 지난 번 울산 임사장이 허가를 내고도 짓지 않는 바람에 허가취소가 되자 아래쪽 도자기집의 민원도 있고 해서 이젠 어떤 허가도 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장영희씨 측에서 자기네들은 점잖아 보이는 외삼촌에게 싸게 땅을 팔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만사를 깐깐하게 따지기만 한다고 도로 땅을 무르고 싶다고 자기에게 항의전화가 다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외삼촌도 웬만하면 컨테이너 박스나 하나 갖다놓고 평평한 곳만 조금 골라 심심풀이로 채소나 심으면서 책이나 보고 글이나 쓰라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있는 돈 없는 돈 다 집어넣고 은행 빚까지 내어 산 땅을 아무 것도 못 하고 놀릴 판이라고 생각한 열찬씨가 저녁에 구청지적과장으로 있는 14층 박태국씨를 만나 어런 저런 사정을 이야기 하자

“형님, 제가 내일 군청에 알아보지요. 젊을 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울산광역시로 넘어간 친구들이 있어요.”

하더니 이튿날 저녁 전화로

“형님, 혹시 형질변경이나 건축허가를 낸다고 도장을 받아간 일이 있나요?”

“없는데.”

“그렇지요. 지주의 도장을 받아 신청서를 작성한 일이 없는데 군청에 무슨 허가가 접수되나요? 군청 건축과에는 명촌리 287-1번지일대에 대한 어떤 민원이 접수된 일이 없답니다.”

“아니, 그러면 2월말, 그러니까 구정 전까지 건축허가가 난다고 한 말은 무엇일까?”

“땅을 팔기 위해서 함부로 말한 거지요. 아마도 땅을 개발할 때 개발개획을 작성한 설계사무소와 한 편이 되어 행정적으로 골치 아픈 사안은 모두 설계사무소로 미루고. 설계사무소에서는 자기들이 기본도면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저런 핑계로 일을 어렵게 보이게 해서 비싼 설계비나 추가비용을 받고...”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

“땅을 살 때 틀림없이 구정 전까지 건축허가를 내준다고 한 건축사, 그러니까 설계한 사람을 만나 따져야지요. 지금 여건상 다른 사람은 개발계획도면이나 내용을 몰라 도무지 건축허가를 낼 수도 없고 오로지 자신만이 허가서작성이 가능하니 어떻게 하나 보자, 직접 찾아와서 사정사정하는 걸 기다리는 거지요.”

“그렇구나. 내 구청국장으로 퇴직한 사람이 그걸 몰랐구나.”

“형님 같은 관리자가 세부적 실무까지야 알 수 있나요.”

“알았어요. 내 연구해볼게.”

“예.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림=서상균]

이튿날 장영희씨로 부터 설계사 안병도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열찬씨가

“건축사 안병도씹니까?”

“예.”

“명촌리 287번지의 땅을 산 지주 홍영순의 남편 가열찬입니다. 장영희씨와 매매계약을 할 때 건축허가관계를 문의할 때 구정 전까지 허가가 난다고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죠?”

“예.”

“그런데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가시나요? 벌써 두 달이 더 지나고 한 20일 있으면 구정인데.”

“예. 그게 임야형상변경하고 토지형질변경하고 또 건축허가에 따는 문화재지구심의건하고 하도 복잡한 사안이 많아서 늦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선결요건인 산 16-1번지에 대한 임야형상변경하고 토지형질변경은 어떻게 진도가 나가는지 모르지만 내 땅이 아니라서 말할 수가 없고 내 땅에 대한 건축허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아직 경계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니 도면 보니 주변의 건축허가조건완화를 위해 287-1,2 제 땅의 일부를 떼어 이웃 부지와 도로를 반듯하게 낸 도면이 있던데요?”

“예. 그래도 구체적 건축허가를 위해서는 실제로 측량을 해야...”

“이해할 수가 없군요. 건축허가신청은 도면상으로 하고 하가행위자체는 현장을 답사해서 내어주는 것 아니오? 또 만약 경계측량이 필요하다면 지주에게 이야기를 하여야 하고?”

“예.”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건축허가를 낸다면서 허가서에 명의자의 도장을 찍어가지도 않았으니 아직 허가신청은커녕 착수조차 않았다는 거지요. 이건 명백한 직무유기가 아닌가요? 관허업소인 설계사무소에서 부동산업자와 한 통속이 되어 전화상으로는 모든 것이 금방 될 것처럼 이야기 하고 실질적으로는 손끝하나 끼딱하지 않고?”

“그, 그게...”

“구두, 아니 전화로의 약속도 일종의 계약이며 귀책사유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특히 개발에 관한 정보는 물론 구체적 도면까지 가진 건축사사무소에서 말입니다?”

“아, 네에. 그건, 그건...”

“오늘이 1월 29일인데 내일모래 1월말까지 구체적 움직임이 없으면 나름대로 대책을 세울 테니 그리 아세요. 괜히 나중에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

하고 전화가 끊겼다.

이튿날 장영희씨에게 아니 선생님은 설계사를 그렇게 닦달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항의전화가 왔다. 나는 장영희씨의 말을 믿었는데 땅을 팔아먹기만 하면 내몰라 하는 법이 어딨냐고 따지니 그런 건 다 설계사무소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라 자신은 신경을 안 쓴다고 했다. 그래서 안병도설계사는 이제 좀 움직이는가 물어보니 그건 모르겠고 자신에게서 열찬씨의 명함을 받아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라는 이야기였다.

열찬씨가 이야기한 1월 말일에 건축사 안병도씨의 전화가 오더니

“죄송합니다. 서류는 현재 작성 중에 있는데 우선 허가신청서에 지주 홍영순씨의 도장을 좀 받아야 하니 사무실로 좀 와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니 여태 똥구멍으로 숨을 쉬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엎드려 있다 이제 뭐하냐고 따지니 도장이나 찍어 달라 하디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예. 그렇지만 신청서작성의 경우 예외 없이 사무실에 들러서 찍어주시는데요.”

“그건 업무절차를 정식으로 밟을 때 이야기고 근 3개월이나 손끝도 얄랑 안 하다가 급하니까 와달라는 건 아니지 않소?”

“그렇지만 신청서작성은 원래부터...”

“그래 도대체 설계사무소는 어디요?”

“신복로타리 옆의 명촌동입니다.”

“그 동네 이름이 명촌인 것은 마음에 들지만 내가 울산지리를 통 몰라요. 내가 아는 울산은 부산서 버스를 타고 가는 울산대 앞하고 공업탑 로터리 밖에 몰라요.”

“그럼 공업탑 로터리에 내려서 택시로 오시든지.”

“내가 왜 비싼 택시를 타?”

“예?”

“건축사님 승용차 있지요?”

“예.”

“불편하지만 울산대정문으로 좀 오이소. 내가 거기서 도장가지고 기다릴 게요.”

“사람을 어떻게 알아보고요?”

“어깨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허연 영감이 노란 5호봉투를 들고 있으면 긴 줄 아시오.”

“아, 예. 그럼 몇 시로?”

“아침 먹고 부산에서 올라가자면 한 11시, 그렇지 11시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잠시 후 버스정류장으로 다시 전화가 와서

“국장님, 하도 궁금해서 전화를 드리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밀어붙이는지 이유나 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열찬씨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국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내가 고향땅에 채소나 심으면서 글을 쓰러 들어가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 나이 60후반에 비로소 들어가려는데 허가 절차가 늦어 농사도 못 짓고 집도 못 짓고 1년을 허비하면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지 몰라도 그런 큰 손실이 어디 있겠소?”

“아, 예. 그러고 보니 시인이고 문인회장님이시네요.”

“내 이건 이야기 않으려고 했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날 무식꾼 취급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허가를 지연시켜 한 해 농사를 못 지으면 책임을 물으려고 생각도 다 했어요?”

“예?”

“약속기한을 지키지 않은 건축사사무소의 법인에 대한 책임과 건축사개인에 대한 책임 말이요.”

“예에?”

“내 말이 좀 지나쳤나? 앞으로는 서로 얼굴 붉히지 말도록 합시다.”

“아, 예.”

버스를 타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문득 집히는 게 있어 박태국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찜찜해. 산 16-1번지 임야의 임상변경과 형질변경에 대한 허가신청이 접수되었는지 한 번 알아봐주세요?”

했더니 부산에 채 닿기도 전에

“형님, 명촌리일대에는 어떤 허가도 없답니다. 단지 도로개설허가는 났는데 아직 사용허가신청이 안 들어왔고.”

“그래요? 진짜 골 때리네.”

하고 박장로에게 전화를 걸어 처남과 처남친구의 땅은 허가신청을 한다고 도장을 찍어주었는지 물어보라고 하자 한참이나 지나 허가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허가비용을 주면서 하도 절차가 복잡하고 힘이 든다고 해서 약간의 수고비까지 주었다는 답변이었다.

“히야!”

구청의 감사계장과 기획감사실장을 하면서 직원을 단속하여 적발된 비위에 대한 징계를 하면서도 세상이 먹고살기에 험해서 그렇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라고 되도록 사람을 덜 다치게 하던 그 너무 온정적이고 위엄이 없다던 감사관, 단지 재산이 없고 청렴하다는 이유로 감사직을 지낼 땐 내면서 아직도 세상이 이처럼 혼탁하거나 부정부패에 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천하의 갸열찬 자신에게 까지 예외 없이 사람을 무시하고 속이는 폐단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인생을 헛살았나? 온실 속에서 자랐나?)

이튿날 아침9시에 집을 나선 열찬씨가 모처럼 49번 버스를 타고 노포동 시외버스정류소를 향했다. 거기서 울산직행 1127변을 타기 위해서였다. 망미주공 앞에서 버스를 타고 대한색소삼거리를 지나 안락로터리를 거쳐 동래시장, 부곡시장을 지나 부산대 앞을 통과해 구서시장앞 고개를 넘어 롯데캐슬아파트가 눈에 들어오자 그만 가슴이 덜컹했다. 벌써 근 1년이나 못 가본 물망골의 밭, 미운인연, 고운인연인 교장선생님과 통장님, 윤선생과 이호열씨는 다 잘 지내는지 궁금해 아직도 손바닥 만 한 땅을 부치며 물망골을 드나드는 황서방의 이야기를 떠오려보았다.

먼저 교장선생은 점점 정신이 없어지고 행동이 굼떠지는 대신 욕심과 심술을 하늘을 찔러 열찬씨가 밭을 포기하고 떠날 즈음 몸이 약한 윤선생도 밭농사를 포기하고 딸이 사는 양산신도시로 떠나고 간암에 걸린 이호열씨도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통장님도 원두막을 뜯는 바람에 마음이 상해 교장선생의 밭을 포기하고 자기가 개간한 조그만 밭뙈기만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걸 무슨 큰 기회라도 된 듯이 등산로입구와 약수터에 <주말농장경작자구함>이라는 팻말을 걸어 무려 다섯 명의 새 경작자에게 필지 당 15만원씩 이라는 거금을 받아 한층 기세가 등등해졌다고 했다. 그래나 새로 들어온 경작자들이 씨를 뿌리고 울타리를 정비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별별 간섭에다 심술을 다 부려 그 중 두 사람은 한 달을 못 버티고 밭을 뺐는데 애초에 준 소작료를 돌려주느니 못 주느니 언성을 높이고 싸우다 절반을 내어주고 다시 팻말을 달자 또 새로운 경작자가 나타나 15만원을 받으니 이래저래 재미만 쏠쏠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재미있는 사실하나는 열찬씨와 둘이 2만 5천 원씩 합자해서 5만원을 주고 산 알루미늄 새시 지개를 열찬씨가 떠날 때 2만 5천원을 내어주고 인수한 것이 너무나 아까워 이젠 자기 외엔 아무도 쓸 수 없게 쇠사슬로 창고 벽에 매달아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해 추석 전에 금정산일대에 큰 비가 왔을 때 안 그래도 산의 높이나 배후지역에 비해 골짜기가 좁은 물망골에 일시에 물이 범람해농토와 원두막을 몽땅 쓸어갔는데 다른 집 밭은 곡식이 넘어지거나 물결에 휩쓸리고 황토흙 복새 흙이 덮쳐 벗겨낼 정도의 피해인데 비해 교장선생의 밭은 통장님의 원두막이 있던 자리에서 맨 아래쪽 큰 밭의 높이 2미터나 되는 언덕까지 넓이가 7-8미터, 깊이가 2-3미터가 되는 물웅덩이가 생기고 둑이 무너져 표토(表土)가 유실되어 도저히 농사를 짓기에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그 점잖은 통장님이

“그렇게 모진 짓을 하니 천벌을 받지. 미리 원두막을 철거하고 물러난 나나 윤선생이나 이호열씨, 특히 아예 골짜기를 떠난 이국장이 이 골짝에 얼쩡거리다가 물에 휩쓸려 죽기 딱 알맞았는데 참으로 하느님이 보살핀 것이야.”

하며 한 때 다정히 지낸 사람들을 회상했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렇게 큰 피해를 당해 다시 농사를 지울 수 없게 된 경작인들이 교장선생에게 웅덩이가 파인 땅을 원상해복해줄 것을 요구하자 교장선생은 천재지변이라 자기는 변상해줄 수 없다고 잡아떼었고 그러면 15만원의 경작료 중 절반이라도 내어놓으라는 사람들에게 사모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악담을 늘어놓아 교장선생은 치매환자로 사모는 심술궂은 마귀할멈으로 몰렸다고 했다.

문득 자신이 한 해전에 나온 것이 참 잘 된 일이라고 저무는 오후에 혼자 원두막에 앉아 막걸리 한 통을 놓고 생각에 잠기기 좋아하는 자신이 그렇게 집중호우가 몰아닥쳐 원두막과 울타리가 휩쓸리고 언덕이 무너지던 날 막걸리에 취해 낮잠이라도 자다 무슨 변을 당할 지도 모를 위험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은 생각에 모골이 다 송연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열찬씨보다 한 수 더 높은 애주가, 월남전의 소대장으로 훈장을 받은 보훈대상임을 무엇보다도 자랑으로 생각하며 연금이 나오는 날에 한 잔, 참전수당이 나오는 날에 또 한 잔, 한 달에 두 번씩 생기는 수입에 여교사인 딸 찔레씨의 봉급날에 용돈을 받아 또 한 잔, 술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해 통장님의 원두막에서 나날이 마시면서도 5일장 오시게시장이 열리는 2일, 7일마다 장터를 휩쓸며 나이 일흔이 되기 전에 딸기코가 되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소화가 안 되고 식은땀이 나서 병원에 가니 간암말기로 판명되어 한 달쯤 병원에 입원했다 가망이 없다고 퇴원해서 물망골 밭에 마지막으로 올라와 통장님, 윤선생과 작별인사를 한 뒤 일주일 만에 유방암에 걸려 5년 넘게 투병중인 아내, 그 아내에게 자연식품을 먹이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는 그 아내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신통한 건 마지막 봉사로 자기 몸에서 적출(摘出)가능한 모든 장기를 기증했다는 것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