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뜻밖의 귀촌(3)
명절이 지난 며칠 뒤였다. 틈만 나면 책상에 앉아 A4용지를 펴고 <명촌리 농장배치도>라는 거대한 타이틀 아래 감자처럼 길쭉한 사각형으로 생긴 땅에 가로세로 금을 긋고 집 약50평, 화단 및 마당 약50평 제 1농장 70평, 제 2농장 70평, 제 3농장 30평, 제 4농장 30평, 제 5농장 10평이라고 써 넣고는 다시 <명촌농장 식재계획>이란 제목 밑에 농장별, 작목별로 꼼꼼하게 적어 넣는 열찬씨를 보며
“아이도 놓기 전에 똥두디기 먼저 준비한다고 우리 어무이가 늘 그래쌓더니 당신은 지금 대나무도 덜 베어낸 땅에 무슨 집을 짓고 화단을 만들고 밭에다 곡식을 심소?”
하고 기가 차서 웃는데
“설 쐬면 건축허가가 나고 그러면 금방 대를 비고 땅을 고르겠지. 그러면 들깨 심었던 앞쪽으로 우선 한 5,60평 땅을 만들어 달라 하고 급한 대로 열무랑 고추를 심지.”
“참 꿈도 야무지시오.”
하면서도
“당신 요새 눈이 반짝반짝 하요.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며 제 땅 한 평 없이 기가 팍 죽은 당신 생각하면 나도 마 보기는 좋소.”
하며 웃었다.
설이 지난 지 한 열흘이 지난 3월 초순이었다. 아직 봄이라기보다는 스산한 겨울하늘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더니 문득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지는데 한여름처럼 줄기차게 쏟아지는 것이었다. 영순씨도 없는 빈 방에서 창밖의 빗소리를 듣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열찬씨가 소파에 번듯이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낮잠이 들었는데
“여보세요?”
아득한 꿈속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예.”
잠결에 받은 전화기의 발신번호가 낯설어 이 우중에 누군가 싶은데
“명촌리 287-1,2번지 지주이시죠?”
“예. 우리 집 땅인데요.”
법무사사무실이나 설계사무소의 누구쯤으로 생각하는데
“예. 여기는 프라임건설입니다.”
“프라임건설이라?”
“예. 명촌리택지건설현장의 토목공사를 맡은 회사, 그러니까 선생님 댁 땅 앞에 도로를 개설한 회사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방금 일기예보에서 울산지방에 50미리 이상의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상북면 같은 산간지대에는 피해가 클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요?”
“선생님 땅은 그 위쪽 산에서 내려오는 자연하천의 우수가 쏟아져 피해가 클 것 같습니다. 지금 대를 베어내는 땅은 물론 우리 회사가 시공 중인 하수구와 맨홀을 덮칠 우려도 있고요.”
“그래서요?”
“1차적으로는 지주인 선생님께서 물을 좀 막아달라는 것입니다.”
“예에?”
머리가 띵해진 열찬씨가 한참을 생각하다 방재안전과장을 지내며 여러 가지 상황처리를 하던 생각이 떠올라
“실례지만 프라임건설이라 하셨나요?”
“예.”
“정식으로 등록된 전문토목회사인가요?”
“예. 그렇지요.”
“선생님은 전무시고요?”
“예. 김정식 전무입니다.”
“그래요? 김정식 전무님, 지금 정신이 있나요?”
“예?”
“계곡물이 쏟아지는 현장에서 지주가 물을 막다 사고가 나면 전무님이 책임을 지나요?”
“예에?”
“개발업체로부터 공사를 발주 받아 현재 시공 중인 회사의 토목 일을 왜 지주가 해야 하나요?”
“예에?”
“지주가 무슨 힘으로 방금 폭포처럼 쏟아지는 계곡물을 막는단 말입니까? 삽으로 막으란 말입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일단 지주께서 알고나 있어야...”
“당연히 공사를 시공 중인 회사가 필요한 안전조치를 해야지요. 내가 알기로 아래쪽에 도자기 굽는 집이 있어 2차 피해, 침수나 매몰도 우려되는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중장비가 있고 토목기사가 있는 시공회사에서 해야지요. 전무님 토목기사자격증 있지요?”
“예.”
“토목기사나 되는 사람이 우째 일반인한테 수방공사를 하란 말입니까?”
“지금까진 지주에게 말하면 다들 알아서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많이 특별하십니다.”
“만약 인명사고라도 나면 회사책임일까요? 얼마 전에 땅을 산 지주책임일까요?”
“...”
“그리고 여기는 부산입니다. 방금 우수가 쏟아지는 현장을 장비와 인력과 기술이 있는 시공회사가 수습해야 됩니까? 아니면 부산에 사는 민간인이 수습해야 됩니까?”
“...”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건축허가를 비롯한 모든 일이 하나도 진척은 되지 않고 모조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벌어지는지 참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찜찜해 생질 또식씨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을 가보라고 했다.
한참 뒤 이제 비도 멎었지만 프라임건설에서 조치를 해서 아무 피해가 없이 물길이 잡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화를 할 당시 이미 현장에서 조치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긴데
(그 참 한심한 사람이야. 그 긴박한 상황에서 뭣 때문에 전화를 했을까?)
하던 열찬씨가 문득 고개를 끄떡거렸다.
“오라. 공사비를 뜯기 위해서로구나. 추가공사비를 요구하러...)
날씨가 조금씩 풀리면서 동그랗게 돌아가는 주공아파트의 순환도로의 느티나무에 연두 빛 새움이 트기 시작했다. 겨우내 엎드렸던 동백도 빨간 꽃송이와 파란 이파리에 한층 선연한 광채가 맴돌았다. 열일곱 풋 처녀의 입술보다 더 붉은 산당화가 서툴게 바른 립스틱처럼 아지랑이 속에 번지자 키 큰 벚나무들도 수런대며 꽃봉오리를 준비하는 것 같았지만 거칠고 희멀건 수피(樹皮)의 은행나무는 죽은 파충류처럼 그냥 엎드려 있었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올해는 또 무얼 심을까 궁리를 하고 아직 파종철도 아닌 빈 밭을 둘러보며 혹시 밭둑아래 머위는 돋았는지 살피다 슬그머니 상추씨와 쑥갓을 심던 열찬씨는 괜히 좀이 쑤셔 날마다 언양행 시외버스를 타는데
“당신, 오늘도 갈 거요?”
“가 봐야지. 뭐. 별일도 없고.”
“그래 허가절차는 잘 되어간답니까?”
“아직 별 움직임이 없어 준비 중이겠지.”
“대밭은 좀 베어내고?”
“큰 생질 박장로가 가끔 비기는 비는데 가뜩이나 덩치도 작은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비 내겠노?”
“박집사는 요?”
“다른 현장이 있는지 지 형 맡겨놓고 안 보이던데.”
아직 정식으로 계약한 것은 아니지만 둘째 또식씨가 현재 건축업을 하는 만큼 공사는 당연히 자신이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아직 산림임상형질변경이나 건축허가도 나지 않은 대밭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위잉, 전기톱소리도 요란하게 베는 것은 물론 지금 한창 토목공사를 하고 있는 프라임건설의 전무라는 사람과 어울리며 사소한 심부름도 마다 않고 건축허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등학생일 때 공부보다는 체육이나 축구에 관심이 많고 나름 골짝골짝에서 힘 좀 쓴다는 여드름이 덕지덕지한 동급생들과 어울려 좁은 면소재지 산전바닥을 휩쓸며 자기네 동급생 여학생은 물론 나이가 훨씬 많은 처녀들이 지나가면 괜스레 휘파람을 휙휙 불다 생활지도교사나 체육선생에게 자주 기합을 받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해 귀가하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다 어떤 때는 자고 들어오기가 일쑤였던 아이였다. 열손가락 찔러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다섯 자식 중 넷이 들어와 복닥거리고 설쳐도 아직 안 들어온 둘째, 다섯 중에서 덩치도 젤 크고 성격도 신들뻔들 좀 허황하기는 하지만 늘 사람 좋은 표정인 새까만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아 어머니 금찬씨가 늦게라도 들어오면 저녁밥을 먹이려고 아직 냉장고도 없는 살림에 개다리소반에 밥상을 차리고 기다리다 인기척만 나면
“야야, 인자 오나? 밥이나 묵고 댕기야지.”
하며 바닥에 숭늉이 담긴 솥에 국그릇, 밥그릇을 넣고 거냉(去冷)을 시키면 입에서 술 냄새가 푹푹 풍기는 아이가 제 아비 눈치를 슬슬 살피며 멀찍이 앉으면 벌써 한 쪽 다리도 버덩다리에다 간장까지 망가져 잠깐 일을 하거나 바깥출입을 하면 몇 시간이나 죽은 사람처럼 엎드려 있던 아비 수진씨가
“저놈의 손이 또 술을 쳐묵었구나? 하기사 걸음마 떼기 바쁘게 제 아비 심부름으로 사개이구판장 집에 술 받으러 가는 기 일이었으니 내가 할 말도 없지만...”
하고 중얼거리다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사실 열찬씨가 알기로도 계집애처럼 예쁘장한 장남 일식이는 키도 작고 온순해 혼자 술심부름을 보내기에 뭣 했지만 두 살이나 많은 형보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숯장사처럼 시꺼먼 둘째 또식이는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하고 만사에 겁이 없어 휴가 온 열찬씨가 놀러와서 수진씨가 닭이라도 잡으면
“형님아, 구판장에 술 받으러 가자. 아부지, 한 되만 우선 받아오면 되지요.”
하고 나서서 무거운 술병을 제가 들고 오기도 했고 칼치못에서 낚시를 하다가도
“아부지, 송애 하고 가무치 잡았심더.”
하고 술안주가 될 붕어와 가물치를 들고 달려오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는 일 없이 또래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쏘다니며 술을 마시고 가끔은 싸움질도 하고 며칠 안 보이기도 해 혹시 명촌바닥에 경찰차가 오거나 순경이 보이면 마음 약한 장남 일식이가 괜히 우리 동생 화식이를 잡으러 왔나 싶어 간이 콩알만 해지는 그런 세월이 몇 해나 흐르도록 동가식서가숙으로 어디서 자고 무얼 먹는지도 모를 정도로 헤매다 문득 부산의 외갓집에 간다고 친구하나까지 데리고 연산동의 셋방으로 들이닥쳐서는 오면서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온 골목이 떠들썩하게 동사무소 다니는 언양사람 가열찬씨가 우리 외삼촌이라고 아무나 잡고 물어보다 정작 집에 들어오자 말자 둘이 마주 보고 꼬시라져 잠이 들었다가 놀란 영순씨가 사무실로 전화해 열찬씨를 부르고 속 풀이 재첩국에 점심을 준비해 먹이자
“인자 부산 외갓집도 와봤고 외삼촌 마 갈랍니다.”
숟가락을 놓자말자 일어나는 걸
“하룻밤 재우며 술이라도 한잔 먹이면 좋겠지만 이미 떡이 되서 안 되겠다. 아부지 엄마 걱정한다. 어서 올라가거라.”
하면서 차비사마 용돈 몇 푼을 주자
“안 주시도 되는 데...”
하면서 넙죽 받아 떠나자 여태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일곱 살 쯤 된 슬비가 그 제서야 울음을 터뜨린 일도 있었다. 그 사이 아버지 수진씨가 세상을 떠나 이제 집안에 겁나는 사람도 없어진 뒤 군에 갔다 온 뒤에도 여전히 그럭저럭 왔다갔다 지내는 또식씨에게 삼동에 사는 왠 처녀하나가 죽자살자 따라다니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금찬씨가 곰곰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자기아들이 덩치도 크고 성격도 시원시원해 어느 처녀가 보아도 반할 만 할 것 같기도 해서 마침내 장가를 보내기로 했다.
보통 덩치에 얼굴이 가무잡잡한 처녀는 별 특징도 없는 시골처녀였지만 아버지가 제법 쫀쫀한 대농가라 밥을 먹고 지낼 만하니 비록 장모 될 사람이 죽어 살림살이가 서툴지는 모르지만 이쪽도 아비가 없는 판이라 그걸 트집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장가를 들면 처갓집 끈으로라도 밥은 굶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이곳저곳 건축공사장을 맴돌며 아버지 수진씨가 하던 톱질과 대패질을 흉내 내며 남들보다 힘 하나는 좋아 그럭저럭 버텨나가며 아이를 둘이나 낳아 콧구멍이 단 또식씨는 어미 금찬씨는 물론 이모 순찬씨가 밤새 울음을 터뜨리며 이제 정신을 차리고 교회에 나가 하느님이 아들이 되어 축복을 받으라고 통사정을 해도 끄덕도 않던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문득 그 좋아하던 술을 끊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벌써 아이 둘이 딸린 네 식구에 또 아내의 배가 불러와 자신도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제일 골치 아픈 아들이 새사람이 되자 할렐루야!를 연호하며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던 금찬씨가 장남 일식씨와 의논해 사거리에 있는 100평이 조금 넘는 닷 되지기 논도가리를 집을 짓도록 주기로 했다. 아이가 셋이나 되면 더 이상 셋방살이를 하기 힘든 동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말썽꾸러기 동생을 그렇게 새 사람으로 만든 제수씨가 너무나 대견하기도 한 일식씨도 두 말없이 따랐다. 더 이상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지만 건축공사장에 돌아다니던 또식씨는 여기저기서 건축자재를 사기도 하고 얻기도 하고 자기랑 같이 일하던 인부들과 부지런히 집을 지어 두 달 만에 입주를 했는데 그 사이 몇 번 사촌의 장인어른이 왔다간 것을 보아 처가에서 건축비도 좀 돕고 양식거리와 장독간의 살림까지 많이 도와준 것 같아보였다.
그렇게 차츰 자리를 잡은 또식씨는 설치전문으로 높은데 올라가서 일하기를 전문으로 하는 노랑머리 호동이란 노총각과 죽이 맞아 교회의 첨탑을 설치하는 일에서 해수욕장이나 축제, 각종 이벤트 장에서 높다란 공작물이나 텐트, 가설무대설치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공사를 맡아 일을 하다 이젠 토목과 조립식건물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히고 열찬씨 또래의 연변출신 조선족 노인하나까지 가세해 또식씨가 공사를 떼고 자재를 넣는 사장이 되고 두 사람이 인부역할을 하는 회사형태를 갖추고 닷 되지기, 백 평 정도의 논에 스무 남은 평 남짓 집을 앉힌 주변에 철골과 파이프와 합판 등 온갖 자재들을 고물상처럼 늘어놓고 등말리언덕에 <울주공업사>란 버젓한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우장바우처럼 신들뻔들 사람만 좋아 보이는 박 집사가 제대로 집을 지어낼까?”
“뭐, 잘 하겠지. 오리에 농막도 그럴 듯하게 안 지었던가?”
“내가 보기에 꼼꼼하고 알뜰하지가 않아. 뒷손도 뜨고. 그저 신들뻔들 사람만 좋아 보여 그걸 믿고 들어가면 매조지가 잘 안 되거나 속상하는 일도 생길 것만 같은데.”
“당신은 일을 시켜보지도 않고 무슨 그런 소리를 하노?”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뭐라?”
한마디 하려고 아내를 쳐다보던 열찬씨가 허허 웃고 말았다. 철없던 시절 술이 떡이 되어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쳐들어온 덩치 큰 조카를 보고 놀란 가슴이 아직도 생각만 하면 두근거리는 건지도 몰랐다.
“사람이 길을 두고 뫼를 가나? 조카가 건축업을 하는데 남한테 일을 주면 내가 우째 누님을 보노?”
“하긴...”
“그 보다 현주가 새집지어 이사 온다는 소리 들었제?”
“형님이 슬쩍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 하더라.”
“그 아이가 온다는 것이 반가운 건가? 골치 아픈 건가?”
“내가 아나? 당신 조칸데.”
영순씨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들리는 말로는 청주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위서방과 결혼해 잘 산다고 하고 지난 번 제 어미의 칠순 때도 은진이라는 딸과 셋이 커플로 한복까지 맞춰 입고 보란 듯이 돌아다녔지만 영순씨는 늘 뭔가가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청주의 유창훈이라는 덩치가 태산만 한 총각이 자그만하고 되바라져 앙발고라는 별명이 붙은데다 오빠 넷 틈에서 <우리 박양>이라고 아버지 수진씨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버릇없이 자라 무엇이든 제 마음 내키는 데로 행동하는 기분파 아줌마, 그것도 아이가 둘이나 딸린 사람에게 죽자살자 목을 매어 나는 이미 자식이 있다고 손을 내저어도 아이가 있어도 좋다, 아이들에게 아비노릇까지 해주겠다는 말에 정분이 나긴했지만 정작 결혼 말이 나오자 그 말을 못하고 총각인 상대에 맞게 이쪽에서도 처녀로 시집가는 것처럼 했다.
큰오빠가 장로에 어미와 가족들에 집사가 셋이나 있는 판에 그런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건지, 심지어 하객으로 참석하는 부목사나 신도들 중에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사람도 많은데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도 되느냐는 것이 가톨릭에 갓 입문한 순수한 신앙심의 영순씨를 헛갈리게 했다. 그런데 제사나 집안행사에 만난 금찬씨가 툭툭 던지는 한마디를 듣고 영순씨가 짐작하기로는 무언가가 좀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전업주부인 현주혼자 아진이만 데리고 남편을 청주에 둔 채 울산에 방을 얻어 먼저 내려왔다는 것이 수상했고 또 유서방이 여태 잘 다니던 회사, 그것도 대기업을 퇴직하고 처가 곳으로 내려와 퇴직금으로 집을 짓고 근방의 공장에라도 다니면 살겠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건 보나마나 현주씨가 뭔가 저지르긴 저지른 모양인데 부부가 말을 않으니 그냥 보는 사람만 아찔아찔 속을 끓이는 것이었다.
“그래 현주는 어데 집을 짓능교?”
“우리 밭뙈기 밑에 287-10번지라고 우리 땅 조금 떼어가서 한쪽만 반듯하게 만든 160평짜리 대지가 있는데 거기다 집을 짓는다구먼.”
“그 땅은 바로 앞이 무덤인데다 땅이 안경처럼 두 쪼가리로 이상하게 생겼다면서?”
“그래 지도책에 나오는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미친 여자 꼴로 생겨 쓸모가 없지.”
“우째 땅을 그렇게 잘랐을까?”
“그렇게 자른 게 아니고 옛날 농사짓고 살 때 단 한 평이라도 더 논이나 밭을 만들려고 조금만 평평하면 골짜기로 땅을 파 들어가서 그렇게 된데다 조금 도도록하게 튀어나온 곳엔 어김없이 산소를 써서 마치 손가락처럼 오목조목 들어가고 나오고 한 거지.”
“왜 그런 땅을 샀을까?”
“싸니까 그렇지. 거기다 산 16-1번지의 박장로 처남 천성일이하고 그 친구 되는 김기연이라는 사람의 땅하고 세필지가 꼭 같은 24평짜리 설계까지 되어있다고 하데.”
“생질이 바로 보이는 곳에 살면 서로 울타리가 되어 편리하기도 하지만 서로 안 보였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 불편한 점도 많을 텐데?”
“우짜겠노? 그것 역시 길을 두고 뫼로 가나?”
“그건 그렇고 슬비 기다리겠다. 영감 나는 가니까 국 뎁히서 밥 묵고 오늘은 어지간하면 하루 쉬소. 이따 점심 때 당신네들 그 좋아하는 갑장 하고 점심이나 먹게.”
“참 그라고 보니 미혜 처형 본지 오래 되네.”
“이번 주에 같이 언양 가자더라.”
“몸을 괜찮은가? 항암치료가 몸에 부대끼기는 해도 아직은 견딜 만한가 봐.”
“그래?”
하고 영순씨를 보낸 뒤 식사를 마치고 그릇까지 부신 열찬씨가 털썩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고 모처럼 아르떼라는 채널의 클래식을 듣는데 도무지 뭐가 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게 모두 명촌 현장의 상황이 궁금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 열찬씨가 물통에 물을 넣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 나오며 전화로
“궁금해서 안 되겠다. 내 명촌에 갔다 오께.”
“아이구, 참 별나기도 하제? 내 벌써 미혜언니한테 점심 먹자고 약속했는데.”
“당신도 성질도 급하기는?”
“아니, 언니가 먼저 전화 왔다.”
“그럼 내일로 연기하기로 하지.”
“아이고, 참 부지런한 거도 팔자다. 시내버스비에 시외버스비에 또 시골버스비에 점심값, 참 당신 점심은 우째 묵는데?”
“빵이랑 우유를 사가지 뭐.”
“당신이 지금 빵하고 우유로 점심 때울 군번잉교?”
“우짜겠노? 형편대로 사는 거지.”
“정년퇴직하고 연금생활하면 귀족처럼 점잖게 또 학처럼 고고하게 산다면서?”
“명촌에 집 지으면 나중에 그래 되겠지.”
“알았심더. 조심해서 갔다 오소.”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