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은 전 세계 유일의 유엔 묘지다. 이곳에는 6·25전쟁 당시 자유와 평화를 위해 낯선 땅에 와 목숨을 바친 22개국의 젊은 병사들이 잠들어 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그들의 희생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이 땅의 평화를 말할 때, 우리는 언제나 그들의 침묵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공간에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6인의 ‘대통령 방문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은 참담한 충격을 준다. 특히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국민을 깊은 고통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었고,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과 내란 우두머리 역할로 헌정 질서를 위협하며 탄핵을 당한 인물이다. 그런 이들이 유엔공원과 같은 역사적 공간, 전쟁의 희생과 평화를 기억하는 성스러운 땅에 기념비로 남아 있다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방문 기록이 아니라, 권력의 역사 왜곡과 공공 공간 사유화에 가깝다.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묘역 한가운데, 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인물들의 이름이 돌에 새겨진다는 것은, 그 의미를 완전히 오해한 행위다.
이명박·박근혜·윤석열의 유엔기념공원 방문 기념비(방문석)가 공원 내 ‘유엔군 위령탑’ 앞 공간에 일렬로 놓여 있다. [사진 = 박철]
이승만·윤보선·박정희 방문석(왼쪽부터). 위의 이명박·박근혜·윤석열 방문석 왼쪽에 나란히 놓여 있다. [사진 = 박철]
유엔공원은 정치적 선전의 무대가 아니며, 특정 권력의 흔적을 남기는 장소가 아니다. 기념비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역사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회적 방문이 그러한 가치에 해당하는가? 단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영구히 새긴다는 것은 기념이 아니라, 권력의 자의적 흔적을 남기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
유엔공원은 전쟁의 상처 위에 세워진 평화의 상징이다.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인류 공동의 희생과 화해의 정신이 담겨 있는 이곳에, 한 국가 지도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그 중심에 서 있다면 공원의 중립성과 국제적 보편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유엔군 유족과 해외 방문객들이 그 비석을 마주할 때 느낄 감정은 자랑이 아니라 불편함과 분노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행위가 ‘기념’의 본래 의미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진정한 기념은 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남는 것이다. 대통령이 그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위한 실질적 노력을 다짐하는 일이다. 기념비가 아니라 평화협약, 군축 의지, 인도적 연대가 진짜 기념이 되어야 한다.
유엔공원의 묘비들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강한 메시지다. 그들은 평화를 말이 아니라 생명으로 증언했다. 반면 대통령 방문 기념비는 그 숭고한 침묵을 깨뜨린다. 권력이 남긴 흔적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희생의 기억은 세대가 바뀌어도 남는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유엔공원이 누구의 것인가. 한 정권의 기념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류 전체의 평화를 상징하는 공동의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강력히 요구한다. 유엔공원 대통령 방문 기념비를 철거하라. 그 비석은 평화를 기리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고, 국민의 고통과 역사를 왜곡하는 표식이 되었다. 평화는 권력의 흔적 위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 비석이 사라질 때 비로소, 유엔공원은 다시 본래의 의미를 회복할 것이다. 유엔공원이 진정으로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기도의 땅으로 남기 위해, 우리는 지금 그 돌을 내려놓아야 한다.
박철 목사
<감리교 은퇴목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