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 (89)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아들 데리고 온 이성구

실록 1637년 7월 7일 기사, 좌의정 이성구 파직 요청
병자호란 때 인조 호종해 남한산성 피신, 주화론 동조
청에 끌려간 아들 몸값 1,500냥 지불, 이후 속환 불가

조해훈 기자 승인 2022.03.15 11:09 | 최종 수정 2022.03.17 11:29 의견 0

조선왕조실록 중 『인조실록』 35권의 1637년 7월 7일 2번째 기사에 ‘양사가 좌의정 이성구가 속하는 값을 올렸다며 파직을 청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실록의 번역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양사가 또 아뢰기를,

“좌의정 이성구(李聖求)는 국가가 황급할 때에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로서 마침내 나라의 일이 이렇게 되게 하였으니, 김류와 경중의 구분이 있기는 하나 혼자만 그 죄를 면할 수 없고, 또 아들을 속(贖)할 때 1천 5백 금(金)이나 주어 이때부터 속가(贖價)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속하고 돌아올 희망을 아주 없어지게 하였으므로 중외에서 원망하고 욕하니, 이성구를 파직하소서.”

위 인용문의 내용이 무슨 말일까? 한번 살펴보겠다.

'명가필보'에 들어있는 이성구의 글씨.
'명가필보'에 들어있는 이성구의 글씨.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구(李聖求·1584~1643)는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의 아들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그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그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면서 가족들은 강화도로 보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계배(繼配·후처)인 안동 권씨, 큰 아들 상규(尙揆)와 자부, 두 딸이 거기서 죽었다. 이성구는 아들 다섯을 두었다. 둘째 아들이 동규(同揆), 셋째 아들이 당규(堂揆), 넷재 아들이 석규(碩揆), 다섯째 아들이 태규(台揆)였다. 둘째 아들인 이동규(李同揆·미상∼1677)는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

알다시피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 태종의 황제 추대에 참여하지 않고, 주전파(主戰派)의 주장으로 정묘호란 때의 강화 조건을 파기하고 국교를 단절하면서 1636년(인조 14) 12월에 시작되었다. 왕족과 일부 관료들은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637년 1월 21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강화도, 경기도 일대에서 약 50만 명의 포로가 청군에 잡혀갔다. 이때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둘째아들인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잡혀갈 때 호종하였다.   

조선인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해당 가족들이 청나라 군인들에게 5~10냥 정도의 돈을 주고 빼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그해 4월에 좌의정 이성구가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 수도인 심양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이 동행하여 5월 15일부터 심양에서 속환(贖還)이 이루어졌다.

'국조 인물고' 권2에 실린 이성구에 대한 내용.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조 인물고' 권2에 실린 이성구에 대한 내용.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해 6월에는 신계영(辛啓榮)이 속환사로 임명되어 피로인 가족들을 인솔해 심양으로 가서 속환을 하였다. 그들은 6월 16일 심양에 도착하여 7월 7일 돌아올 때까지 속환시(贖還市)를 열고 속환 희망자의 주인들과 흥정을 하였으나 몸값을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여 성사가 쉽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몸값의 상한선을 100냥으로 제한하였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몇 백 냥 혹은 1,500냥을 준 경우도 있었다. 결국 수천 명의 대상자들 중에서 겨우 600여 명만 값을 치르고 데려올 수 있었다. 그 뒤 11월에 사은사로 파견되었던 최명길 일행이 다시 780여 명을 속환해왔다. 속환은 그 뒤에도 조금씩 계속되었으나, 국가 차원에서 더 이상 속환사가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속환 사절단을 파견하여 2,000여 명을 데려왔다. 이성구는 1637년 7월 심양에서 아들을 속환하면서 몸값으로 1,500냥을 지불하였다. 그 이후로 피로인들의 몸값이 올라 속환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속환가(贖還價)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돌아올 희망을 아주 없어지게 하였다. 그렇다보니 『인조실록』에서 이성구의 이런 행위에 대해 파직을 요청한 것이다. 이성구의 이런 거금의 지불이 아니었더라면 정부가 정한 대로 일정 금액을 주고 더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간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성구의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이성구의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많은 조선인 포로들은 만주 지역에 남아 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사의 큰 비극이었다.

여하튼 태종의 서자인 경녕군의 후손이던 이성구는 1640년에 영돈녕부사, 1641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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