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시인이 읽어주는 좋은 시 (31)】봄날의 소회 - 박재숙

조승래 승인 2024.03.21 08:00 | 최종 수정 2024.03.21 10:03 의견 0

봄날의 소회

박재숙

연둣빛 봄날
팔순이 훌쭉 넘기신 지 오래인 엄마
지팡이 힘으로 아버지 산소를 힘겹게 오르셨다

봉분 위에 함빡 핀
제비꽃 향기가 먼저 달려와
엄마와 나를 반긴다

묏등에 앉아
꼴을 베어 오신 지게 속에서
빨간 산딸기를 한 아름 꺼내주시던,
봄 햇살이 밟으며 따뜻한 무논에서 맨발로 우렁이를 잡던
아버지와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동안

이것 때문에 잔디가 못 자란다고 엄마는 중얼거리시며
등 굽은 허리를 숙여 갈퀴손으로 제비꽃을 모조리 뽑아내신다

아버지의 흘러간 봄날
지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
봄을 몰고 온 제비꽃으로
사랑을 전하고 계신 줄도 모르시고

- 『시와 소금』, 2022년 여름호

봄은 연둣빛으로 시작하고 진초록으로 여름이 된다. 여름에는 녹음이 무르익고 잡초들도 제 몸집 키워서 영역을 확장하므로 약한 풀이나 꽃들도 잔디도 거기에 휩싸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팔순이 넘은 엄마는 ‘지팡이 힘으로 아버지 산소를 오르셨다’ ‘연둣빛 봄날’ ‘힘겹게’. 산소 위에 ‘함빡 핀’, ‘제비꽃 향기 먼저 달려와’ 엄마와 시인을 반긴다. 제비꽃이 제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솔솔 피우는 향기로 마중을 한다는 것이다. 제비꽃이 아버지의 전령이라고 생각하며 ‘꼴을 베어 오신 지게 속에서 빨간 산딸기를 한 아름 꺼내주시던’ 아버지, 따스한 햇살 받으며 ‘무논에서 맨발로 우렁이를 잡던’ 아버지와 함께 한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버지 생전에는 무엇이든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하셨고, 제비꽃 향기로 지금도 주시는 사랑이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그런데 엄마는 ‘이것 때문에 잔디가 못 자란다고’ 중얼거리시면서 그 ‘제비꽃을 뽑아’ 내셨다. 등이 굽은 허리를 숙이고 갈퀴손으로 ‘모조리’.

엄마는 아버지의 봉분 잔디가 더 소중하다고, 먼저 떠난 그분이 덮은 이불 그대로 잘 있기를 바랄 뿐, 그리움일랑 그냥 두시지 뭘 하시려고 제비꽃 연서를 보내고 향기도 보내냐고

노구를 움직이며 감정의 뿌리를 삭제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흘러간 봄날 지상에서 못다 이룬 사랑’일랑 엄마는 그냥 좀 더 참고 기다리시라고 하시는데 시인은 아버지가 ‘제비꽃으로 사랑을 전하고 계신 줄도 모르시고’ 라고 하면서 엄마의 그리움을 애써 모르는 듯 표현한다.

조승래 시인

◇ 조승래 시인은

한국타이어 상무이사,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겸임교수(경영학박사)를 했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이사, 계간문예작가회 부회장, (구)포에지창원 '시향문학회' 회장, 가락문학회, 시와시학회, 함안문인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취미생활로는 검도를 하고 있다(4단. 대한검도회 영무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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