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범도 루트 이야기

김해창 (인본사회연구소 소장·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

‘아, 홍범도 장군! 고통받는 민족과 늘 함께한 그대여! 무명용사들과 총을 들고 떨쳐 일어나, 민족의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일제에 맞선,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여! 이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시니 그대의 숭고한 정신 온 민족의 가슴에 통일의 넋으로 울려 퍼지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1868-1943)의 묘비에 새겨진 추모글이다. 2021년 8월 문재인 정부 때 장군의 유해는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육군사관학교가 2023년 8월, 5년 전 교내에 설치된 독립 영웅(홍범도· 지청천·이회영·이범석·김좌진)의 흉상 철거·이전을 추진해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다.

지난해 12월 울산불교환경연대 대표인 천도 스님이 ‘범도 루트’를 같이 가자는 말씀을 주셨다. 부산에선 윤지형 선배도 함께 가기로 뜻을 모았다. 내친김에 부부 동반으로 가볼까 했는데 양쪽 사모님들로부터 단칼에 거절당했다. “마누라 얼아 죽일 일 있나. 남성 동지만 다녀오소.”

지난 1월 4일부터 9일까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에 참여해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우리 독립군이 일본을 상대로 싸운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우수리스크 하얼빈 등 항일투쟁 현장을 다녀왔다. ‘범도 루트 제10기 대한독립군 2025-0109300 제1군 사령부 직할5지대 특임1소대 김해창’. 현재까지 300명이 참여한, 열 번째 범도 루트 대한독립군에서 내가 받은 군번(표)이다. 부대 구호는 ‘백발백중 일격필살’. 범도 루트의 길잡이는 장편소설 『범도』의 작가인 방현석 중앙대 교수이다. 범도 루트를 가기 전에 『범도』 1,2권을 읽었다. 지난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었는데 그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비참한 프랑스 민중의 삶보다 더 비참한 민중들이 바로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우리 선조들, 한민족의 삶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범도』가 한국판 『레미제라블』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일독립투쟁의 정화인 홍범도 장군. 방 작가는 『범도』를 통해 말한다. 범도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에겐 목숨 바쳐 싸우지 않고 투표만 잘해도 우리가 원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투표 하나를 제대로 못 해 44년 만에 내란범들이 계엄령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장편소설 『범도』는 방 작가가 그의 부친과 조부 3형제가 살았던 만주를 찾았다가 최재형, 김알렉산드라와 같이 역사에 스치듯 기록된 사람들, 그리고 백무아, 김수협, 진포처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그들이 걸었던 길을 10여 년 따라간 결과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오직 자신의 힘으로 길을 열고, 스스로 길이 되었던 사람들. 그 길을 찾아 이제 범도 루트를 떠난다. 3일 밤 윤 선배와 함께 해운대에서 인천공항행 시외버스를 타고 4일 새벽 5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몽사몽하고 있는데 일행들이 속속 들어온다. 방 작가로부터 안내 자료와 함께 일격필살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가 만든 ‘범도수첩’도 받았다. 1분대 11명, 2분대 12명 해서 총 23명이다. 나는 2분대 소속이다. ‘일격필살, 백발백중!’ 구호를 외치고 출발! 1시간 반 뒤에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연길은 연변의 중심이다. 한자(간체자)와 한글로 ‘힘을 합쳐 연변민족단결의 승급판(昇級版)을 구축합시다’라고 쓰인 대형 홍보판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변 건물 간판도 대부분 중국어 한글이 섞여 있었다.

우리가 맨 먼저 간 곳은 파옥투쟁의 역사현장인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이다. 1930년대 이곳에서 독립운동 열사들이 낫, 도끼를 몰래 들여가 300여 명이 전설적으로 탈옥에 성공했고, 그중 80여 명이 『범도』에도 나오는 철혈독립군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첫 단체 사진을 찍으며 구호를 외쳤다. 버스 안에서 방 교수는 시간 나는 대로 연해주 일대 독립군 투쟁사와 투쟁가 등을 소개했다.

훈춘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울진에서 온 사진가 황윤길, 지역활동가 김복자, 울산의 판소리꾼 김소영, 승병 천도 스님, 시인이자 노동활동가 김윤삼, 통일운동가 배성만, 시민활동가 이정현, 여성운동가 김미영, 상주 노나메기농장 고필호, 고동욱 부자, 웹소설가 김경희, 이수린 모녀, 신문기자 박종면, 창작과 교수 김민정, 조교 문소정, 출판인 이광호, 장학사 김양선, 교장 홍순두, 부산의 ‘사관’ 윤지형, 차밭 운영자 유근철, 사천의 벤처사업가 권대우 등 처음 만난 분들이 많지만 낯설지 않고 이래저래 연이 닿는 게 신기했다.

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은 수많은 무장독립전쟁을 통해 얻은 결과인데 우리는 극히 일부만을 배웠어요. 무장독립전쟁은 1900년대 초 국내진공작전에서부터 1945년까지 40년 이상 지속된 전쟁이었고, 최대 수십만이 참여했지요. 서일의 대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북간도에만 해도 40여 개 단체가 활동했습니다. 우리는 4, 5년 나치와 싸웠던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알아도 더 위대한 우리의 무장독립전쟁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번 항일무장투쟁역사학교를 통해 위대한 무장독립투쟁의 영웅들을 가슴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중국 훈춘서 국제버스로 중·러 국경을 육로로 통과해 크라스키노(옛 연추)로 이동했다. 사방이 깜깜해 핸드폰 불빛을 밝히며 크라스키전망대에 올랐다. 이 일대가 한말의병운동의 본거지로 옛 발해성터라고 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남양 알로에의 새 이름 유니베라 농장 안에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단지 기념석 위에 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왼손을 얹어 맞춰 보았다. 살짝 전율이 왔다.

버스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 마을 옛터를 지나 4시간 정도 걸려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도착했다. 밤 10시 반 러시아식 꼬치 전문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닭고기 꼬치 가 아이들 장난감 칼처럼 길었다. 다들 맛나게 먹었다. 첫 숙박지인 아스토리아호텔에 도착하니 12시다. 호텔 로비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탄절은 1월 7일이란다. 다음날 아침 8시쯤 일어났는데도 주위가 어둡다. 이날은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연해주 신한촌기념비를 찾아갔다. 아파트단지 인근에 작은 어린이 놀이터처럼 공간이 조성돼 있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연해주 신한촌기념비 앞에서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국내외 지사들이 결집한 곳이 이곳 신한촌이다. 이곳에서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군 창설 등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해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1937년 불행히도 스탈린의 정책으로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1999년 3·1독립선언 80주년을 기념해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금 3억여 원을 들여 세운 것이다. 거기서 10여 분 걸어서 찾은 곳이 서울거리(2A번지) 번지판이 붙어있는 신한촌의 가옥이다. 외국인이 거주하는데 러시아 한인사를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주변에 컨테이너박스가 많이 보여 난민촌 같았는데 알고 보니 차고라고 한다. 적설에 대비한 차고인 것이다. 근처에 폐선로 같은 철길이 있어 다들 들어가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같이 사진도 찍고 나오는 찰나 터널에서 기적소리가 울리더니 얼마 안 있어 기차가 지나갔다. 위험표지판 하나 없어 폐선로인 줄 알았다가 식겁했다.

이동휘 선생과 무명 독립운동가 기념비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 큰 도로변 한곳에 있는 기념비를 찾았다. ‘이동휘 선생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며’라는 글귀와 함께 이동휘(1873-1935) 선생과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다. 우리는 묵념을 한 뒤 기념비 주변에 덮인 눈을 치우고 임시정부 태극기와 범도 루트 현수막을 펼쳐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다음은 인근 혁명광장으로 갔다. 볼셰비키혁명 지도자와 노동자·농민의 역동적인 모습의 동상이 서 있었다. 서울시청광장보다 넓은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가운데 설치돼 있었다. 인근에 고풍스러운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기에 잠시 들어가 ‘가화만사성 국태민안 남북통일 지구평화’를 빌었다. 내란 수괴 윤석열이 하루빨리 체포·탄핵되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길 두 손 모았다.

나고르늬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모습

이어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나고르늬전망대에 올랐다. 부산 초량 산복도로에서 북항대교와 영도, 광복동 일대를 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다시 바닷가 쪽에 있는 극동해군사령부 잠수함박물관을 둘러봤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잠수함이 육상 박물관이 돼 있었다. 유료였다. 잠수함박물관 안에는 당시 군인들의 흉상이나 군복 수첩 등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부둣가에는 해군 군함들이 정박해 있었다. 또한 커다란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러시아 문호 솔제니친의 동상이었다. 왼쪽 가슴에 책을 쥐고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가까운 지역에 옛 일본총영사관 건물도 보았다. 이곳은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던 대표적인 기구로 건물 지하에 독립 투사들을 투옥했던 감옥이 있었다고 한다. 1층 창문 창살이 보였다. 선열 생각에 창살을 뜯어내는 시늉을 하며 옆 대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정말 나쁜 놈들”.

1860년대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촌 개척리가 있었던 곳을 찾아가니 작은 공원 길 한 모퉁이에 ‘한인 이주 150주년 기념 우호친선비’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가 보였다. 2014년에 세워진 것이다. 빠듯한 일정에 제법 걸었더니 배가 고프다. 저녁은 한식당 ‘명가’. 가는 길에 ‘젊음의 거리’라는 아르바트 거리에 영어 간판 ‘미니 마트’가 눈에 들어온다. 다들 들어가 보드카 한두 병씩을 챙긴다.

저녁을 먹고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향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장장 8,299km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종점이다. 밤 8시 1분 출발, 하바로프스크까지 정확하게 12시간 39분 걸린다. 시속 60km로 모스크바까지는 일주일쯤 걸린단다. 출발 전에 시종점 표지석을 보기 위해 철로 변으로 나갔다 다시 역내로 들어오는 검문대에서 시계를 풀고 맨 나중에 통과했는데 아차 싶어 다시 검색대로 가서 물어보니 모르겠단다. 10년 전 결혼 25주년 때 구입한 낡은 닥스 시계…. 아깝지만 할 수 없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오케안’에 오르는 승객의 여권을 살펴보는 러시아 여성 승무원

우리가 탄 열차 ‘오케안’은 서너 평 되는 ‘4인실 꾸뻬(바곤)’, 2층 침대가 갖춰진 나름 고급 열차였다. 열차 한 량 마다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이 딸려있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러시아 여성 승무원이 검표하러 우리 칸에 왔다. 재미난 것은 승무원이 저녁 도시락 서비스를 하면서 술 과자를 내놓고 판다. 그것도 몇 번이나 온다. 과자 하나가 150루블(약 2,400원)로 싸지 않지만 과자를 좀 넉넉하게 사 줘야 덜 피곤하단다. 그래서 승무원이 검표하러 왔을 때 준비해 간 하모니카로 ‘백만 송이 장미’를 연주해 주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친김에 하모니카 2개를 들고 우리 대원들이 있는 바곤을 돌면서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 ‘백학’, ‘두만강’ 등을 연주하고 보드카 맛도 보았다.

러시아인이 섞여 있는 바곤에서도 연주를 했더니 같이 간 대원이 돌린 모자에 루블화 몇 장이 날아들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오케안 안 러시아인 가족 칸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필자

다음 날 오전 8시 40분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했다. 철로 주변은 눈이 쌓여 미끄럽다. 두툼한 방한복에 거동이 불편하다. 열차에 내리면서 아침 인사가 “아직 윤석열이 체포 안 됐나”이다. 하바롭스크 시내 심장부에 레닌 광장이 있었다. 시골 공설 운동장만 한 광장 전체를 얼음축제장으로 꾸며 놓았다. 얼음 미끄럼틀로 가려는 순간 미끄러져 앞으로 해머 치듯 꽈당 넘어졌다. 두꺼운 장갑 낀 양손으로 이마를 받쳤기에 천만다행이었다. 광장 한켠에는 러시아 사람들 수십 명이 줄다리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을 걸어 그 팀하고 줄다리기 시합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그다음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아무르강(흑룡강)이 있는 콤소몰스카야 광장. 그곳엔 동시베리아 총독 아무르스키 동상이 있었다. 이놈의 나라는 가는 곳마다 동상이다. 양팔을 낀 채 아무르강을 바라보는 거만한 ‘그놈의 스키’의 폼을 따라도 해보았다. 그리고 걸어간 곳이 아무르강이 한눈에 보이는 우초스전망대. 강이 아니라 빙판의 설원이었다. 영하 20도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대원들은 십 리는 돼 보이는 눈 덮인 얼음강 위를 한참을 걸었다. 아이젠을 끼고 조심조심. 눈싸움도 했다. 그런데 아무르강은 볼셰비키혁명 때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돼 버려진 ‘핏빛 강’이기도 했다.

전망대에서 윤 선배가 “우리 박종철합창단원으로서 여기서 ‘적기가’ 한번 힘차게 불러보자”고 제안했다. 영국 노동당의 사실상 당가인 적기가. ‘민중의 피 붉은 피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중략)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여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아무르강 우초스전망대에서 ‘적기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

이곳을 찾은 러시아 사람들도 박수를 쳐줬다. 이에 힘을 얻어 우리는 다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소리 높여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우리나라 민주의 열기가 아무르강의 한기를 녹이는 듯했다.

점심을 먹고 간 곳은 칼마르크스 거리 22번지 옛 극동인민위원회 외교부 청사였던 2층 건물이다. 그곳은 볼셰비키 혁명정부 여성 외무장관이었던 김알렉산드라(1885-1918)의 집무실이 있던 곳이다. 예전엔 소개 명판이 있었는데 근래 러시아 정부가 볼셰비키 역사 지우기를 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김알렉산드라는 『범도』를 읽고 처음 알았다. 김알렉산드라는 조선인 한인사회당, 볼셰비키 혁명당의 최초 당원이었다. 그 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죽음의 계곡’. 이곳에서 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된 김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수많은 빨치산들이 고문을 당하고 총살됐다고 전해진단다. 그곳에 빨치산 희생자 추모 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하바롭스크 시립공동묘지.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로 입구의 추모탑에는 소설가 조명희(1894-1938) 선생 등 한인 지도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묘지 주변 눈 덮인 자작나무 숲길을 걸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오후 7시 40분 하바롭스크역에서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우수리스크로 간다. 9시간 32분이 소요된다. 역 대합실에서 낮에 아무르강 전망대서 만난 낯익은 60대 부부 가족이 반갑다고 말을 건넨다. 이들 부부는 모스크바에서 두 딸과 함께 여행 왔다고 했다. 영어교사를 하는 큰딸은 오는 6월 서울 여행을 할 계획인데 부산도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부산에 온다면 사전에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넸다. 러시아를 다니면서 이곳이 전쟁 중인 나라라는 걸 전혀 못 느꼈다. 우리가 간 곳이 전선에서 먼 후방지역이어서 그랬을까.

다시 오케안 열차를 탔는데 전날 그 여성 승무원이 우릴 보더니 반갑다고 싱긋 웃는다. 이날은 4인실에 8명이 ‘찡겨 앉아’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 다음날인 7일 새벽 5시쯤 우수리스크(소왕령)역에 도착했다. 오전에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고택을 방문했다. 문재인 정부 때 고택을 매입해 박물관으로 오픈했다고 한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고택(박물관) 앞에서

최재형(1860-1920) 선생은 노비의 자식에서 러시아 연해주 최고의 사업가로 13도의군을 조직할 때 군자금을 지원했고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맡았다. 일본군에 체포돼 희생됐는데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고택 내 박물관에는 안중근 홍범도 조명희 김알렉산드라 등 러시아 한인 독립 투사들의 활동이 자세히 소개돼 있었다.

그리고 찾은 곳이 고려인문화센터이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2004년 노무현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아 지은 건물인데 다른 소수민족에게도 개방해 고려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센터 내 고려인역사관에서 항일 의병들의 사진, 특히 전투에서 숨진 의병들의 시신을 놓고 장례를 치르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을 주제로 책 수십 권이 전시돼 있고 고려인 아리랑 노래·영상도 있었다. 센터 입구 안쪽엔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기념비가 서 있었다. 오후에는 우수리스크의 으뜸 항일 유적지로 수이푼강(수분하)가에 있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를 찾았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미션 실패 후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해오던 이상설(1870-1917) 선생은 시신을 화장해 수이푼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단체 사진을 찍고 하늘을 보니 무지개가 섰다. 유허지 인근 언덕을 오르니 넓은 뜰이 보인다. 발해 5경 12부 중 하나로 명마의 고향으로 유명한 솔빈부 성터라고 한다. 다들 말을 타고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대신 그 자리에 빙 둘러서서 다 같이 ‘강남스타일’ 말춤을 신나게 췄다.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아리랑가무단 공연

우수리스크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아리랑가무단 단원과 기념 촬영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최재형 고려인민족학교 방문이었다. 이 학교 아리랑가무단 10여 명이 우리를 위해 특별공연을 했다. 한인 이주의 역사를 춤과 노래로 엮은 공연이었는데 박수와 눈물이 뒤섞였다. 이 학교엔 ‘고려인민족학교 항일무장투쟁 영웅실’이란 교실이 있었는데 방 작가를 비롯한 한국의 회원들이 모임을 만들어 지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짝짝짝.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 복도 벽에 전시된 연해주 러시아 일대 항일 투사들 사진

다음날 8일 오전에 반나절 걸려 중·러 국경을 통과했다. 그리고는 중국 수분하에 도착해 철도박물관으로 바뀐 옛 수분하역을 둘러보았다. 수분하역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위해 안중근 참모중장이 유동하와 함께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던 곳이다. 우리는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 참모중장이 탔던 동청철도를 타고 하얼빈으로 이동했다. 동청철도는 KTX 같은 쾌속 열차였다. 바깥은 영하 19도, 차 안은 영상 23도. 40도 이상 기온차가 났다. 약 3시간 뒤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하얼빈역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심장에 육혈포를 터트린 감격의 장소. 밤이 늦어 역 내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다음날 가기로 하고 우리는 저녁을 먹은 뒤 하얼빈의 상징인 중앙대가를 거닐었다. 하얼빈은 빙등제로 유명한 곳. 중앙대가는 화려한 빛 축제가 펼쳐지고 있었다. 대원 일부는 빙등제를 보러 가고 나머지는 중앙대가를 따라 쑹화강(송화강)을 보러 갔다. 휘황찬란한 밤거리, 자본주의에 완전히 물든 하얼빈 중심가를 거닐면서 상념이 일었다. 밤 9시쯤 완다호텔에 짐을 풀고 범도 루트 마지막 밤 정들었던 대원들과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회포를 풀었다.

일본군 생체 실험장이었던 731부대 전시관 앞에서

마지막 날인 9일 아침이 밝았다. 아침 9시에 맞춰 일본군 생체 실험장이었던 731부대 전시관에 가서 첫 관람을 했다. 정식 명칭은 ‘침화(侵華)일군 제731부대 죄증(罪證) 진열관’이다. 옛 부대 터 건물은 남긴 채 별도로 거대한 박물관을 만들었는데 중국 전역에서 이곳을 찾는 학생·시민들이 줄을 잇는다고 했다. 생체 실험장은 ‘목불인견’이었다. 아팠다.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방명록에 영어로 ‘우리는 일본의 반 인류 범죄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인류에게 범한 전쟁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라. 부산, 대한민국 김해창’이라고 글을 남겼다.

하얼빈역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 안중근 의사 실물 크기 동상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하얼빈역 내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 안중근 의사 실물 크기 동상과 ‘국가안위 노심초사’ 유묵이 우릴 맞는다. 의사의 일생이 중국어 한국어로 잘 소개돼 있었다. 이곳 기념관 유리창 너머로 안 의사가 이토를 쏜 현장이 보였다. 나도 손가락으로 이토를 쐈다. 안 의사 동상 앞에서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일격필살 백발백중!’. 낮 12시쯤 버스로 하얼빈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버스 속에서 우리 대원들은 수료증을 받은 뒤 소감을 나누고 다 같이 ‘독립군가’를 불렀다. 저녁때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해단식을 갖고 야간버스로 10일 새벽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범도 루트 이후 내 생활의 결기가 달라졌다. 범도 정신의 생활화. 홍범도 장군이 포수 시절 강조했던 지피지기, 추격필포, 과감무쌍, 일격필살, 산야일체 ‘포수의 5대 철칙’을 다시 생각한다. 『범도』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동휘 임정 국무총리와 주고받는 말이 심금을 울린다.

“총리, 나라를 되찾으면 말이오, 이 봉오동 같은 나라를 만들어주시오. 넉넉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나라 말이오”, “가진 이들은 져야 할 책임을 질 줄 알고, 없는 사람도 비굴하지 않게 사는 나라 말씀이지요”, “그런 나라를 만들게 시원하게 한 번 이겨 주십시오.”(『범도』 2권 500쪽).

하얼빈역 내 안중근의사기념관 창 너머로 본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현장

범도 루트는 그 자체가 광복 후 이 땅의 자유와 평화 민주의 이상이 투쟁 속에 깃들어있는 새로운 조국의 모습이었다. 거기엔 양반 상놈도,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었다. 조국애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었다. 범도 루트는 방 작가의 말대로 범의 길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걸어간 비범한 길이었다. 100년 전 시대의 절망을 저격한 그들이 선택했던 길은 험난했으나 후회 없는 삶을 민족과 역사에 바쳤다. 우리는 그분들이 꿈꾸었던 제대로 된 희망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할 책무를 졌다고 하겠다. 좀 더 의롭고 용감한 삶을 살아야겠다.

< 김해창 (인본사회연구소 소장·경성대 환경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