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6)
회식을 마치고 식구들을 다 떠나보내고
“당신도 타소. 집에 가서 의논 좀 합시다.”
“안 갈란다. 의논은 무슨 의논?”
“윤 여사가 그냥 넘어갈 것 같나?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지.”
“대책은 무슨 대책? 보리 주면 외 안 주냐고 땅 빌려준 다음에야 회식을 하든, 잔치를 하든.”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그래 알아. 나도 차분히 생각해볼 테니까. 당신 혼자 가. 지금 우리가 같이 가면 차안에서 부터 싸움밖에 더 하겠어? 혼자 가.”
“하긴.”
하고 차에 오르던 영순씨가
“당신 내 가고 나면 깨끗이 청소하고 내일부터 제발 좀 어지르지 마소.”
“와?”
“아무래도 윤여사가 내일이고 모래고 슬그머니 또 와 볼 것이요.”
“엥?”
영순씨를 보내고 돌아서니 완전히 긴장이 풀리면서 아랫도리가 풀렸다. 농막 뒤로 가락지 같은 눈썹달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켜니 그렇게 좋아하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다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과 김치를 찾아 책상위에 늘어놓았다.
이튿날 오전이었다. 오리에 진출한 지 두 달이 넘도록 겨우 통성명만 했지 별 왕래가 없던 보일러 김 사장이
“통뼈 형님 계시요?”
하고 자기네 2층에서 불러도 될 사람을 울타리를 따라 비잉 둘러서 찾아와서는
“형님, 이거 오리랑 오골계랑, 청계의 유정란인데 맛이나 좀 보소.”
달걀 여남은 개가 담긴 플라스틱바가지를 내밀었다.
“이 귀한 것을?”
“무슨 말씀, 형님이 우리 집 봐주는 공이 얼만데.”
“무슨 소리. 김사장집에는 CCTV까지 있다면서.”
“그래도 그게 어디 옆에 사람 사는 것만 같습니까?”
“하긴. 자, 이리 앉으소. 소주로 드릴까, 막걸리로 할까?”
열찬씨가 판을 펴고 술상을 보자
“이따 운전해야 되니 소주 딱 한잔만.”
하고 소주를 꿀꺽 마시고는
“형님, 소금 없소?”
“소금은 왜? 거기 안주 많잖아? 김치도 있고 납새미조림도 있고 미역줄기무침도 있고.”
“저는 원래 안주를 잘 안 먹고 왕소금이나 한 덩어리 먹는데요.”
“이 어른아, 그러다가 속 배리고 몸 배리고 마침내 세상 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 아닙니다.”
깡마르고 검은 얼굴에 불쑥 웃음을 띠우면서
“형님, 어제 식구들 회식할 때 좀 시끄러웠지요?”
“아니. 시끌벅적 떠들면서 논다고 시끄러웠지 뭐.”
“아니, 형님제수씨 말이요?”
“제수씨?”
반문하던 열찬씨가
그 제서야 이웃 사람들에게 윤여사를 집안 제수씨라고 알린 게 생각나
“아아, 그래 별일 없었는데.”
하는데
“아닐 텐데요. 어제 제가 들으니 형님네 한창 고기 구울 때 우리 울타리 밑을 돌아보며 따따부따 별별 욕을 다 하던데요.”
“그럴 리가?”
“내 그 양반 성질을 아는데 자기 땅에서 남의 식구가 고기 구워먹으며 웃고 떠드는 것을 그냥 볼 사람이 아니지요.”
“그냥 안 보면?”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은 물론 눈에 보이는 족족 잔소리를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어째 그 눈꼴시럽은 꼴을 그냥 보겠어요?”
“그런가?”
열찬씨가 이 바닥에 나타나기 전부터 두 사람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있은 모양으로 어느 날 농장을 둘러보러온 윤여사가
“선생님, 저 아랫집에 사람들 조심하이소.”
깔깔 웃고 허허 말꼬리를 흐리는 최유라조영남의 <지금은 라디오시대>가 한창 절정인 닭장 집을 가리키며
“사람이 너무 엉큼해. 못 배워서 그런지 예의도 없고 인사도 안 하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먼빛으로 몇 번 보기는 했으나 아직 인사도 않아 아무 이해타산도 없는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아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생각하는데
“사람이 취미도 고약하지. 다들 전원생활 비슷하게 농사를 짓는 이 골짝에 축사를 짓고 온갖 짐승들을 다 키우면서 날마다 짬빱냄새, 닭똥냄새로 사람 생 골을 아프게 하고.”
“...”
“사내는 왜놈처럼 새까맣게 말라비틀어지고 여자는 백금녀처럼 호박덩어린데 나이 먹은 것들이 남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저 하하호호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그게 제대로 된 부부면 내가 말을 안 하지. 나이 환갑이 다 되어 재혼한 부부로 주말마다 남자자식들, 여자자식들이 교대로 올라와서 시시덕거리고.”
(...?)
도대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남의 험담을 하나 싶었는데 마침내
“거기다 속이 시커먼 이까 복지 아닙니까? 세상에 저 많은 짐승우리를 치고 자기들 먹고 마시는 물을 몽땅 우리 수돗물을 훔쳐서 말입니다.”
그 제서야 본론이 나왔다. 예긴즉슨 지지난해 하도 날씨가 가물어 배밭집 조씨네 지하수가 달랑거려 주인 조씨와 저 뒤 쪽에 생업으로 블루베리를 키우는 젊은 사람 외에는 차마 물도 사용 못 하는 판에 자기 밭에 실컷 물을 못 줘 안달이 난 심술장이 참기름 집 영감이 지하수 물이 안 나온다고 조씨집 우물 옆 배관실로 찾아간 윤여사에게
“그 아래 내려갈 물은 없어요. 이 가뭄에 사람 먹을 물도 아니고 곡식 살리는 물도 아니고 짐승 먹이고 닭장 청소할 물이 어디 있어요?”
엉뚱한 소리를 해
“할아버지 무슨 소리에요?”
가타부타 따지기에 누구보다 능한 윤여사가 뜻밖의 시비초청에 눈을 반짝이자
“윤 여사가 지난번 날씨 가물다고 물탱크에 가득 채운 물이 다 어데 갔는지 압니까?”
“물탱크에 물이 어디 가다니요. 우리 시숙께서 썼겠지요.”
“그 기 아니라 보일러 집 담 밑이나 한번 둘러보고 이야기 하지요?”
해서 담 밑을 둘러보니 풀 섶에 돌돌말린 수도호스가 한 뭉텅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윤여사는 물론 열찬씨까지 없는 날이나 밤에 보일러 김씨가 윤여사네 물탱크에 호스를 연결해 물을 빼간다는 것이었다. 당장 전화를 걸어 김씨를 불러올린 윤여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지자
“아니,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 가뭄에 물 좀 갈라 먹기로?”
무슨 인심이 그리 고약한가 하는 투로 심드렁하게 받자
“아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김 사장은 도전(盜電), 도수가 얼마나 죄질이 나쁜지도 모르요?”
“무슨 소리? 날씨 가물 때 물 좀 나눠 쓰는 거야 인지상정이지. 그럼 저 죄 없는 짐승들을 곱다시 말라 죽이란 말이요?”
“아니, 그럼 집에서 물을 싣고 오든지 우물 파서 호스 깔고 물탱크 짓고 전기세 낸다고 부담금 낼 때는 핫바지에 방구 새듯이 쏙 빠지고서.”
“아니 말 잘 했다. 이웃 간에 내가 보일러 하는 걸 뻔히 알면서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러 공사시킨 사람이 누군데?”
“아니, 그 말이 거기서 왜 나오는데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아니, 자기 편리할 때는 넘어진 울타리 말뚝 좀 박아 달라, 언 수도 좀 녹여 달라, 장골이 좋은 힘에 삽질 몇 번 해주라고 통사정을 하는 사람이 누군데?”
하자 얼굴이 벌개져 한참이나 끙끙거리던 윤 여사가
“당신 진짜 물 도둑으로 기장경찰서 가봐야 알겠어요?”
하는 순간
“그래 말 잘했다. 당신은 불법매립, 형질변경으로 군청에 불려가 확인서 쓰고 벌금 좀 물어봐야 알겠어요?”
“뭐라고요? 뭐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아니, 사람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세무공무원하던 남편 끼고 조선천지 방방곡곡에 탈세는 다하는 부동산투기업자가.”
“뭐요?”
그렇게 싸우다 흐지부지 했다는 것인데 그 따지기 좋아하는 여자가 이웃을 배려해 넘어간 것이 아니라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부동산투기로 걸려 세금을 맞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전에 남의 음식 먹는 사람이 아닌데 형수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이 콩이파리 무친 것 좀 봐.”
그 짜디짠 콩잎 한 접시를 거의 다 비우고 소주를 근 한 병이나 비우는 지라
“그러다가 술 취하면 우째 갈라고?”
“안 되면 자고 가면 되지요.”
하고 자세를 고쳐 앉더니
“형님 밭 일구는데 혹시 이상한 물건들 안 나오요?”
“나오지. 쇠 동가리도 나오고 철사뭉치도 나오고. 또 벽도이나 블록조각에 나무 조각에 사기그릇 부서진 것에 전기부속들... 좌우간 땅 파는데 철사뭉치는 정말 골치가 아파.”
“혹시 약통이나 주사기는 안 나오고?”
“나오지. 가끔 한 뭉텅이씩.”
“그거 보소. 원래 매실 밭이나 형님이 농사짓는 땅이나 우리 집터가 이 골짝에 움푹 파인 논인데 저 야시 같은 투기꾼이 늙은 농사꾼부모가 죽고 버려진 땅을 군청에 다니는 아들한테 헐값으로 사서 저 앞에 고사리 뜯는 야산에서 황토 흙을 파다 불법으로 매립을 하며 산업쓰레기처리업자에게 목돈을 받고 온갖 불법폐기물을 함께 묻어서 말입니다.”
“저런?”
“좌우간 돈 앞에서 못 할 일이 없는 여잡니다. 자기는 입만 열면 일광 땅, 김해 땅, 또 지리산 밑에 땅, 땅 자랑 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 땅 하나하나가 저렇게 불법으로 뀡 먹고 알 먹는 기 아닌지. 좌우간 내 땅 한 300평 고른다고 쓰레기를 몇 차나 수습해서 비싼 돈 주고 묻었다 아입니까?”
“그래?”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요. 풀을 베고 약을 칠 때 마다 김해 논 부치는 사람 지리산 밭 부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일꾼처럼 부려먹고 품삯 한 푼 안 주고 밥도 넉넉히 안 산다고 내한테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고...”
“...”
“또 요 아래 월내에 노총각하나가 4월부터 10월까지 한 달에 20만원씩 받고 약치고 풀 베는 날 도와주기로 했는데 한 서너 번 하고는 돈 한 푼 안 받고 작파했다 아닙니까? 40평생을 살며 이렇게 악착같이 부려 먹고 먹는 것조차 아끼는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말입니다.”
“아이구, 혹시 잘 못 본거 아이가? 설마 우리 제수씨가 그럴 리가?”
하고는 베개를 꺼내주며
“안 되겠다. 김 사장, 술 오르면 한숨 자소.”
하자
“아, 아입니더.”
하고 일어나 비실거리며 걸어갔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