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4)

손이 큰 영순씨가 밥이고 반찬이고 넉넉히 했음에도 대호씨가 과연 덩치 값을 하는지 엄청 먹어대는 바람에 금방 밥과 반찬이 동이 나는데

“사모님 음식솜씨가 아주 환상입니다.”

입이 짧다던 이선생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맛있게 커피를 홀짝거렸다. 벌써 오후 세시가 가까워 부지런히 해야 저물기 전에 마칠 것 같아

“한 70%만 타게. 이번엔 내가 칠 게.”

“아닙니다. 젊은 제가 한 번 더 하지요.”

대호씨가 씩씩하게 나서는 품이 진짜 국가대표 4번 타자 이대호 같았다. 순간 가까운 배 밭의 라디오에서

“예. 5번 타자 강민호의 솔로홈런! 드디어 0의 균형을 깨고 홈팀 롯데가 선취점을 올렸습니다.”

아나운서의 열띤 목소리를 듣다 문득 농막 쪽을 바라봤다. 거기 이선생이 텔레비전으로 별 취미도 없는 야구를 보는 둥 마는 둥 할 것이었다. 정작 밥보다도 야구를 좋아하는 자신은 이 땡볕에 서 있는데...

이제는 2/3통도 무거웠다. 비실거리며 겨우겨우 한통을 쳐나가는데

“아, 노장 이명우 오늘도 구원실팹니다. 통한의 3점 홈런을 맞아 마침내 1:3으로 역전되고 말았습니다.”

가뜩이나 숨이 막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이야긴가 저도 몰래 얼굴이 벌개진 열찬씨가

“에이 씨! 오늘은 뭐 되는 게 없네!”

벌컥 화를 내자

“...?”

울상이 된 영순씨가 빤히 바라보는지라

“아니, 롯데 말이야. 오늘도 또 역전패할 것 같아.”

“아이구, 놀래라!”

영순씨가 윤여사를 보며 씩 웃었다. 다시 대호씨가 한 말을 치고 열찬씨 순서가 되자

“아, 안 되겠어. 약은 둘째 치고 일어설 기운도 없어.”

“예. 그럼 제가 한 번 더 하지요.”

대호씨가 순순히 나오자 약을 타는 사이에 냉장고에서 막걸리와 잔을 들고 온 열찬씨가

“자, 우리 막걸리 한 잔씩 하고 하자!”

사발에 따라 건배를 하는데

“안주도 없이?”

영순씨의 말에

“목이 말라 술은 절로 넘어갈 끼고 만약 안주생각이 나면 얼굴에 땀을 한번 쓱 훑어서 혀끝에 대면 간간하게 안주가 되고도 남지.”

“아이구, 저 위생관념도 없는 칸츄리보이!”

한참 뒤 또 한통을 치고 와서

“이제 몇 나무 안 남았습니다. 한 반통 하면 될 텐데 제가 마자 하지요.”

하는 대호씨에게

“아니 그 정도는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숨 좀 돌려.”

하고 약통을 매고 나갔는데 바로 배 밭과 경계지점이라 라디오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데

“예 9회말 1사 1,3루 절호의 기회, 타석에는 두 번째 타석에서 솔로홈런을 쳤던 강민호선수, 최소한 병살타가 아닌 평범한 내야땅볼이나 외야플라이만 쳐도 동점이 되고 만약 장타가 터진다면 굿바이 히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기분 좋게 약을 치고 등에 맨 얼마 남지 않은 약통을 흔들어 출렁출렁 소리를 듣고 마지막 펌프질을 하는데

“예. 잘 맞은 볼! 안타냐? 아, 안타깝습니다. 유격수 정면 병살타, 오늘도 롯데는 불운에 울어야 하는군요. 이상 사직야구장에서 전해드렸습니다.”

“...”

일을 마친 홀가분함보다도 롯데가 졌다는 사실이 가슴을 억눌렀다.

(더럽게도 재수 없는 날이네.)

분무기를 벗고 비누칠을 해 세수를 하는데

“수고했습니다. 같이 저녁식사라도 하셔야죠.”

윤 여사의 말에

“피로한 데 어서 집에 가서 더운물에 샤워라도 했으면.”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영순씨가 가로막자

“어차피 샤워는 우리도 해야 되는데. 그만 같이 가십시다.”

이선생의 간곡한 말에 윤여사를 흘낏 쳐다본 영순씨가

“그럼 그러든 지요.”

하고 각자의 승용차로 윤여사가 지목한 자기 모교 일광초등학교 뒤의 백숙집으로 향했는데 자리에 앉으면서

“이집 백숙이 맛도 좋지만 닭이 커서 한 마리로 너덧 사람은 실컷 먹지요.”

윤여사의 말에

“중노동 끝이라 다들 배고플 것 아닌가? 배 큰 대호도 있고?”

이 선생이 나서자

“그렇다고 두 마리 시키기는 무리고. 우선 메밀묵에 동동주를 시켜 급한 불을 꺼지.”

하고 잔을 채워 건배를 하자 백숙이 들어왔는데 그리 커보이지도 않았다.

“자, 귀하신 몸 우리 서방님!”

앞 접시에 닭다리 하나를 떼어놓은 윤여사가

“다음 오늘의 최고 일꾼 우리 아들!”

하다 깜짝 놀라는 영순씨와 대호씨를 보면서

“아니, 이 선생님!”

방향을 돌리며

“자, 먹읍시다.”

하는데 닭고기가 입에 뱅뱅 도는 열찬씨가

“동동주는 텁텁해서 안 되겠네. 아지매 시원소주 한 병!”

해서 소주를 홀짝거리다 부지런히 먹는 이 선생네 세 식구 틈에서 넋을 놓고 앉은 영순씨의 옆구리를 찌르며

“당신은 와 안 묵노?”

“점심 때 꽁치찌게를 맛있게 먹어서. 난 원래 백숙냄새 안 좋아하잖아?”

하며 마주 보며 웃었다. 가족회식 중에 회든 고기든 음식이 좀 모자랄 것 같으면 먼저 영순씨가 입맛이 없다며 천천히 먹고 그래도 모자랄 듯 하면 영서어미가 숟가락질이 느려지는 그 희한한 매너가 나온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역시 이 집은 맛도 좋고 양도 많단 말이야.”

윤 여사가 의기양양하게 셈을 치르고 작별인사를 한 뒤 차가 저 만큼 떠나는 걸 보며

“어서 타소! 칼국수 집에 가자!”

“칼국수?”

“그래 장골이 다섯이 닭 한 마리로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영순씨가 픽 웃었다.

[그림=사상균]

다음 일요일에 마침내 부산에 사는 김순란패밀리의 봄 소풍 겸 삼겹살파티가 열렸다. 부부가 미리 새벽미사를 다녀온 영신씨 부부가 모처럼 화사한 야외 복으로 갈아입고 벌써 해병대에서 제대한 아들 교영이를 데리고 왔다.

도무지 해병대 같지 않던 호리호리하고 여린 청년은 지금도 제대군인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고등학생 같은 앳된 모습으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제 어미가 일하는 영서네 만두가게에 자주 놀러와 이런 저런 잔일을 돕다가 근 스무 살이나 많은 이종매형과 저녁에 소주 한 잔 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다 영신씨나 슬비로 부터 돈 몇 푼을 얻으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곤 했는데 몸이 가볍고 친절해 가끔 자진해 판매대에 나서면 만두를 받아드는 아기씨들의 손길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다. 메마르고 새까만 이 철없는 총각에게 처녀들은 무한의 매력을 느끼는지 하루는 자주 오는 어떤 아가씨 하나가 가게 안팎을 힐끗힐끗 살피더니

“이집 학생은 어디 갔나요?”

묻다 이집 학생이 아니고 가끔 놀러오는 친척이라고 말하자

“그럼 다음에 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하고 눈을 빛내더니 거의 매일 만두를 사러 와서 매장 안을 살피기도 했다.

“와, 우리 형부 밭이 거의 신대륙이네. 원도 한도 없이 땅을 일구겠네.”

영신씨가 탄복하는 사이

“아이구, 이 울타리 넘어간 것 좀 봐. 우리 형님은 아이디어는 좋은데 당최 마무리가 안 돼.”

황서방이 교영이를 데리고 넘어진 울타리를 세우다

“말뚝 박고 그물 묶어 고정시키는 과정이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 형님 혹시 망치랑 톱이 있나요?”

해서 구서동에서 얻어온 공구함을 받아 열어보면서

“야, 완전히 엔지니어 연장통이네. 없는 것이 없네.”

감탄을 했다.

“맞아. 그 연장통을 남긴 분이 구서동 제일의 목수였대.”

“그래. 이 정도는 갖추어야 남자지. 나는 자기 집에 형광등을 갈고 거울이나 문고리, 초인종을 달 연장도 없이 일일이 사람을 부르는 형님 같은 사람은 이해가 안 돼.”

하다 방금 막 들어와 자기도 돕겠다고 나서다 운동화 밑바닥에 못이 박혔다고 쩔쩔 매는 막내 김서방을 보고

“야, 신기하네. 다른 사람들은 일부러 박아도 잘 안 박히는 못이 단번에 운동화를 찌르다니?”

하면서 김 서방은 그만 빠지라고 하니 모처럼 야외에 나와 신이 나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주형이, 지현이 남매와 어울려 풀밭여기저기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이어 영서네 식구가 도착해 영서는 바로 이모 지현이와 어울려 민들레 꽃대를 꺾어들고 씨방에 붙은 홀씨를 날린다고 입을 오무렸다 폈다 까르르 웃는데 세 살짜리 현서는 집에서 미리 장화를 신고 온 모양으로 한 손에는 방에 있는 탁상시계를 들고 또 한손에는 호미를 들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아무데나 쿡쿡 땅을 찔러보기도 했다.

“아따, 다들 일찍 오셨네.”

마지막으로 처남 갑린씨가 아내와 작은 딸 혜원이를 데리고 도착하자 말자

“교영아, 이리 나와 봐. 그물 고정작업은 그렇게 하면 안 돼지.”

하고 제 매형과 손발을 맞추는데 그렇게 능숙할 수가 없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