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서상균]

23. 문서없는 노예가 되어(14)

이틀 뒤 일찌감치 작품도 마치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흘낏흘낏 울타리 밖을 바라보며

(지금 어디쯤 왔을까? 월내역 지나 한빛 아파트까지는 찾아와도 부산울산 경계지점에서 좌회전을 잘 해야 될 텐데...)

하다 설마 길을 모르면 전화라도 하겠지 하고 기다린 것이 벌써 열한시가 넘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열찬씨가 성수자시인에게 전화를 거니

“예. 선배님!”

반갑게 받는데

“다 와 갑니까? 너무 늦어 길을 못 찾나 싶어서.”

“아, 예. 정상적으로 출발했는데 갑자기 언니가 머리를 해야 된다고 미장원에 가는 바람에.”

“뭐, 머리를? 그럼 나도 샤워라도 해야 될까?”

“하하하. 당연히 샤워를 하셔야죠. 몇 년 만에 견우직녀가 만나는 건데.”

하고나서 아무래도 우스운지 또 한참이나 깔깔 거리고 웃는 것이었다.

“길을 안다니까 한빛아파트 지나서 울산광역시 경계표지판 보이면 좌회전 하면서 내게 전화하세요. 내가 마중을 나갈 께.”

하고 전화를 끊고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띠고 서성거리는데

“선배님, 한빛아파트입니다.”

“아, 알았어요. 경계지점에서 좌회전해서 쭉 달려서 언덕을 넘어오세요. 내가 마중을 나갈 게.”

하고 부리나케 달려 원룸 옆 언덕을 넘어오면서

(내가 다 늙어서 이게 무슨 꼴인가?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하면서 가쁜 숨을 고르며 다시 빠르게 큰길가로 나오는데 빵빵, 마침 고개를 넘어선 지프차하나가 클랙슨을 울리며 직선으로 달려오더니

“선배님!”

성수자 시인이 손을 흔들며 내리고

“오랜만이요.”

“오랜...”

운전석에 앉은 채로 미소를 띠는 순영씨와 악수를 하고

“머리는 왜?”

처음 보는 은발에 의아해하자

“매번 염색하기도 귀찮고 해서 열찬씨랑 칼라를 맞췄지요.”

“뭘 그렇게나.”

하면서 두 사람이 서로를 찬찬히 들여다보는데

“그 좀 엔간히 들 보세요. 얼굴 뚫어지겠다. 옆에 사람 생각도 좀 해야지.”

하면서 수자씨가 어렵게 의자를 젖히고 뒷자리로 옮겼다. 순영씨의 남편이 성격이 좀 특이해 부부 외에는 사람이 타지 못 하게 일부러 그렇게 생긴 차를 사서 어쩌다 딸네식구라도 태울 때면 욕을 먹는다고 했다.

운전석 옆에 앉은 열찬씨가

“머리냄새가 좋다. 천년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

하고 미소를 띠우자

“어련하시겠어요?”

수자씨가 웃는데

“자꾸 그러면 난 부끄러워서 집에 갈래.”

순영씨도 열찬씨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야, 넓고 좋다! 우리 밭 하고는 비교가 안 되네.”

“순영씨 밭은 얼마나 되는데?”

“한 100평. 그것도 골짝 논이라 밭 도가리가 길고 밭둑이 많아 별 실속이 없어.”

“영감님은 잘 도와주는가?”

“그럼. 손끝이 야물어 두 손 갈 일이 없는데 재미있는 건 손재주를 발휘할 울타리나 오솔길, 도랑을 덮을 다리를 만드는데 취미가 많고 곡식재배는 주로 내가 하지.”

“그리고 상추랑, 오이랑, 가지랑 토마토는 주로 내가 갖다 먹고.”

둘의 대화에 수자씨가 끼어들더니

“나는 저 수돗가와 개수대가 제일 맘에 들어. 저렇게 넓은 공간에 물이 잘 나오고 볕이 좋고 바람 잘 불어 식기든 빨래든 금방금방 마르는 이런 초원에서 살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 한 여자로서.”

“그렇지만 불편한 점도 많아요. 라디오도 칙칙거리고 텔레비전도 흐릿하고 특히 화장실이...”

열찬씨가 창고 문을 가리키며 쑥스럽게 웃는데

“안 그래도 내가 아까 집구경한다고 창고 문 열어보다 봤는데 우리 어릴 적 생각이 나서 절로 웃음이 나더군. 그래도 좌변기덮개 사다 덮은 걸 보면 선배님은 응용력도 좋아. 선녀 같은 우리 언니가 문제지.”

하는 사이에 순영씨가 테이블위에 무언가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꺼내놓으며

“우선 집들이부터 합시다. 열찬씨 판이 있나요?”

“예.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집들이보다는 밭들인데 멋지게 한잔 합시다.”

하고 방에서 호마이가판과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 식기와 김치, 막장이 담긴 통과 수저통을 꺼내 순영씨에게 넘기고 냉장고에서 삼겹살 한 뭉텅이를 들고 나오자

“야, 없는 게 없네. 아주 멋진 가든파티가 되겠어.”

빨랫줄에 걸린 타월 둘을 걷어와 열심히 테이블과 판을 닦던 수자씨가

“요건 걸레로, 요건 행주로 쓰자.”

하고 핸드백에서 사과와 배를 꺼내 깎자

“나도 열찬씨 먹으라고 메밀묵을 좀 사왔지요.”

순영씨가 묵과 묵장을 펼치고 <매취순>이라는 솔도 한 병 꺼내며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있다니. 우리가 언양에서 같이 문예반 하던 생각이 다 나네요.”

하면서 잔을 채워

“건배!”

를 한번 외치고

“총각김치가 보통이 아니네. 묵은 김치도 그렇고. 홍여사가 요리전문이라더니 우리는 신발 벗고도 못 따라 가겠어.”

순영씨의 말에

“언니도 잘 하잖아? 아무튼 선배님은 좋겠어. 아내는 물론 첫사랑까지 모두 요리박사라.”

묵은지를 한 점 먹어보더니

“삼겹살 구워 먹으면 파지래기도 필요 없겠다.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나.”

하면서 프라이팬에 고기를 얹는데

“잠깐, 내 파 뽑아올 게.”

열찬씨가 후다닥 달려가 통통한 대파 한 줌을 뽑아오자

“파 농사 잘 했네. 해파가 벌써 이만큼이나 컸네.”

두 여인이 껍질을 벗기는 사이 열찬씨가 고추장과 참기름을 찾아오자

“비닐장갑 없어요?”

순영씨가 돌아보는데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마 그냥 하지. 손맛이 얼마나 좋은지, 또 순영씨가 직접 만든 음식도 먹어볼 겸.”

하며 큰 양푼하나를 꺼내주자 파와 고춧가루, 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무치며 뭔가 아쉬운 듯 돌아보는 순영씨에게

“혹시 이거?”

열찬씨가 매실액이 든 병을 꺼내주자 순영씨가 방긋 웃는데

“빙고! 두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네. 이런 걸 판소리에서 뭐라는 줄 알아요?”

“글쎄...”

고개를 젓는 순영씨를 보며

“나는 알지.”

“뭐라고?”

“연놈이 손발이 척척 맞는구나.”

“빙고! 정답입니다.”

수자씨가 넓은 접시에 삼겹살을 담아 상에 올리며

“이만하면 만추의 소연에 부족함이 없겠군. 아직 추석은 안 지났지만.”

하고 순영씨가 사온 <매취순>을 따더니

“언니가 먼저 형부 한잔 부어주구려. 형부도 답례로 붓고.”

하며 잔을 건네주는데

“니 뭐라캤노? 뭐, 형부라고?”

“그럼 뭐라 카갰노? 의형제 맺은 지 50년이 다 된 언니의 남잔데.”
“뭐, 또 언니의 남자라?”

어이없는 듯 웃으며

“자 받으소. 이래 술 부어주기 처음이제?”

“아니. 전에 한두 번 있은 것 같은데 이래 좋은 분위기에서는 처음이야.”

열찬씨도 잔을 따라주며

“건배!”

“오랜 연인들을 위하여!”

하며 첫잔을 마시자

“열찬씨, 묵 좋아하지요?”

“그럼. 촌놈치고 묵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노? 그런데 내가 묵 좋아하는 묵보라는 건 우째 알았지?”

하며 병원에 올 때마다 묵을 해오던 신평 큰누님과 김해 둘째 누님을 떠올리는데

“우리 엄마가 묵을 잘 만들어서 가을만 되면 오롱조롱 4남 3녀의 우리 7남매가 간월산 동자골이나 명촌 뒷산에서 도토리, 아니 굴밤을 주워 와서 엄마가 묵을 쑤었는데.”

“맞아. 묵 솥에 불을 때면 엄마가 펄펄 끓는 묵 솥을 커다란 나무주개로 휘휘 젓다가 묵이 어느 정도 굳어져 더 이상 주개가 안 돌아가고 똑 바로 서면...”

“맞아. 그 때 묵을 푸는데 아직은 다 굳어지지 않아 주개 끝에 주르르 흐르는 그걸 우리는 묵당숙이라고 불렀지.”

“맞아. 뜨거운 묵당숙을 한 양푼이 받아 묵장을 넣어 휘휘 저어서 먹으면.”

“둘이 죽다가 서이 죽어도 모른다고.”

하며 순영씨가 묵 한 점을 집어

“어서 마시소.”

하고 건네주자

“내 이런 말 안 할라 캤는데 진짜 연놈의 손발이 척척 맞네.”

수자씨가 웃으며

“내 살다 살다 환갑진갑 다 지낸 이도령과 성춘향은 처음 보네.”

하고 삼겹살을 한 점 집어 소주와 함께 마시며

“어쩔 수 없이 향단이 노릇을 하지만 키 크고 건들건들한 방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며

“형부, 자 내 잔도 받으소.”

하며 술을 부어주자

“고마워, 처제.”

하던 열찬씨가

“사실 순영씨를 거쳐 만나는 사람들은 호칭이 다 어중간 해. 몇 년 전에 순영씨의 휴대폰에서 언니 되는 사람의 사진을 보고 내가 뭐랬는지 알아?”

“뭐랬는데?”

“처형이 수수하면서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고.”

“저런 본인이 들었으면 기겁했겠네.”

“어쩔 수 없지. 비록 마음뿐이긴 하지만 50년도 더 전부터 제부가 아닌가?”

“허허 참.”

민망한 표정으로 순영씨가 시선을 돌리며

“들깨 꽃이 참 이쁘다. 나는 열찬씨가 말하기 전에 들깨 꽃이 저렇게 예쁜 줄 몰랐다.”

애민 소리를 하는데

“그렇지 굳이 복사꽃, 능금 꽃이 아닌 농작물도 예쁜 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쑥갓 꽃, 감자 꽃이 예쁘고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무장다리, 그러니까 무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하얀 참깨 꽃은 작은 색소폰처럼 생겼는데 그렇게 순결해보일 수가 없고...”

“또 두 사람이 손발이 척척 맞네. 억지로 이야기 돌리지 말고 자 또 한잔!”

건배를 하자 셋 다 눈에 술기운이 오르는데

“나는 인자 고만 할래. 이따 운전해야지.”

“그럼 잠깐!”

열찬씨가 밥통에서 밥을 한 양푼 떠오면서

“순영씨는 밥하고 먹어요.”

“그래요. 진짜 이집 김치 하고 식은 밥 한 번 먹고 싶었는데.”

하며 상추위에 밥을 얹고 삽겹살을 놓고 김치까지 한 쪽 올리는데

“언니, 나는 그거 누구 줄 건지 다 알아.”

“무슨 소리?”

“부끄럼 타지 말고 먹여줘.”

“니 자꾸 그러면 다음부터 안 데리고 온다.”

“피. 자꾸 그러면 내가 같이 동행 안 한다. 그럼 다시는 못 만나게.”

하며 수자씨가 억지로 열찬씨에게 먹이고

“자, 날씨도 좋고 돼지감자 꽃도 좋고 늙은 연인들도 좋고!”

또 열찬씨에게 술을 권하는데

“성시인!”

“예. 갑자기 우리 선배 왜 이리 심각한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고 그런 나를 못 버리고 주춤주춤 평생을 따라다니는 순영씨도 이상하지만 그런 순영씨의 S동생이라고 저 또한 벌써 20년째 따라다니는 성 선생도 참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거야 피차일반이지요. 그런데 나는 언양사람 가열찬이란 시인, 비록 선배님은 언양중학교과 농고, 나는 상북중학과 여상이라 직접 선후배는 아니지만 그 동향선배가 향토색이 물씬하면서도 아련한 첫사랑의 애조 띤 시집을 내어 한창 매스컴을 타고 부산문단에 얼굴을 낼 때 나도 언양사람이란 말은 못 하고 저 선배의 마음을 사로잡은 첫사랑의 여인은 누구일까 정말 궁금했는데 으아, 놀래라, 그게 남도 아닌 순영이언니인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또 얼마나 재미있고 흐뭇하고 또 신통하고 좌우간 그 때 그 기분이란...”

“그 때 안 놀랬어요? 야수와 미인 같은 조합이라고.”

“아니. 언니 같은 미인이면 그만한 사내 한, 둘은 당연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진진한 로맨스가 현실로 시가 되고 시집이 되고 만인의 입에 회자가 되고, 아무튼 우리 언니는 본래 예쁘게 태어나기도 했지만 한 여성으로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편이지요. 첫사랑은 물론 평생 잊지 못하는 연모(戀慕)의 여성, 뭐 굳이 어렵게 묘사하면 구원(久遠)의 사랑이 되었으니까요.”

“수자씨, 고마 해라. 내 얼굴이 화끈거려 앉아있을 수가 없다.”

순영씨가 소녀처럼 부끄럼을 타는데 ...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