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이 본 세상>
피아니스트 한동일의 삶과 음악
류지석(문화공간 봄 대표)
서곡
원로 피아니스트 한동일 선생이 새해를 며칠 앞둔 지난해 12월 29일 저녁, 83세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작년 3월 부산문화회관에서 제자와 듀오 콘서트를, 9월에는 사상구에서 토크콘서트를 하였기에 선생의 갑작스러운 부음은 필자에게도 큰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부터 선생을 잘 알고 지냈던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는 “우리 시대의 아이돌 같은 음악가이자, 한국 피아노 역사의 거인”이라며 고인을 추모하였다. 최근 조성진, 임윤찬으로 대표되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국내외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성공의 역사는 1965년 23세의 피아니스트 한동일이 한국인 최초로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그분의 연주를 실제로 작은 규모의 문화공간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원로 피아니스트는 문화공간 봄의 ‘하우스 콘서트’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 2019년 3월 9일 토요일 오후, ‘봄’의 아트홀에는 문화공간의 역사에 남을 만큼 많은 청중이 몰려들어서 금방 60석의 좌석을 다 메웠다. 행사를 준비하던 매니저와 직원도 놀라서 창고의 보조 의자를 모두 동원했지만, 무대 바로 앞까지 공간이 있는 곳은 모두 청중이 자리 잡았다. 슈베르트, 쇼팽, 슈만, 바흐로 이어진 이날의 연주회에서는 원로 피아니스트의 원숙함과 경륜이 녹아든 감동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선생은 지나온 삶의 장면들을 이야기하고 들려줄 곡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자세히 설명하였다. 연주자의 표정과 손의 움직임까지 볼 수 있고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하우스 콘서트에는 대규모의 공연장의 연주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매력과 감동이 있었다. 연주란 단지 악보에 충실하게 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소통하며 자신의 해석과 의미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과정임을 잘 보여준 무대였다. (이날의 연주는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동일 선생은 자신의 삶을 3악장의 소나타에 빗대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필자도 이 글을 오페라의 형식을 빌려 4막으로 구성하여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려 한다.
1막 – 음악 신동에서 피난민으로
함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한동일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13개월쯤에 ‘나비야’를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여 함흥중앙교회의 성가대(한 선생님 표현으로는 찬양대)를 지휘하였다.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고 성가대원들이 집에 와서 함께 연습하곤 했다. 그때마다 어린 동일은 형과 함께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3살 때쯤 연주자가 돌아간 다음 혼자 건반을 누르며 들었던 곡의 음을 쳤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절대 음감을 지닌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피아노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어느 날 소련군이 마차를 끌고 와서 집안의 가재도구들을 모두 실어가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피아노도 실어 가려 하자 아버지는 다른 것은 다 가져가도 좋으나 우리 아들이 피아노를 좋아하니 피아노만은 남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지휘관은 그 아들을 찾아서 총으로 쏴버리라고 부하에게 지시하였다. 다행히 그때 동일은 할아버지 집에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참담한 사건을 겪자,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1947년 가족은 함흥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을 거쳐 동두천에 도착해서 마차를 빌려 임진강에 다다랐다. 그러나 소련군이 철교를 지키고 있어서 건너지 못하였다. 그때 어린 동일은 군인에게 다가가 어머니가 준 건빵을 건넸다. 그러자 초병은 고맙다고 말하더니 건너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동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선선히 가족이 다리를 건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서울에 도착한 가족은 피난민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동일의 피아노 교육을 위하여 애썼다. 부모님은 생계를 위하여 (요즘의) 충무로 쪽에서 세탁소, 빵집 등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빚을 내서 피아노를 구입하여 아들의 피아노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어린 동일은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면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고 심지어 그날의 연습 시간을 채우지 못했으면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서 연습시켰다. 어느 날부터 옆구리 쪽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는데 아버지는 피아노를 치기 싫어서 엄살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해 야단을 치셨다. 그래도 증상이 계속되자 병원에 가보고 이상이 없으면 혼내줄 거라 말했는데 병원에서는 늑막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아들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엄하게 훈련시켰던 아버지는 큰 죄책감을 느끼고 피아노를 팔아버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기가 좋은 마포 쪽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병에서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오랫동안 피아노와 멀어져 있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동일 가족은 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서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북한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피신해 있다가 9.28 수복을 맞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제주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 가서 서대신동과 초량 등지에서 살면서 사대부속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유엔 참전국 병사들과 야전병원의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해군 산하에 ‘정훈 어린이 음악대’가 25명의 어린이로 구성되었는데 동일도 음악단원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52년 전쟁 중에도 부산 영도 영선동의 이화여고 천막 가교사에서 ‘전국 초등학교 아동 음악 콩쿠르’가 열렸다(이화경향 콩쿠르의 시작). 이 대회에서 동일은 3등에 입상하여 상장과 부상으로 은수저 한 벌을 받았다. 훗날 화가로 활동하는 김덕주가 1등, 한국의 대표적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게 될 신수정, 이경숙이 2등과 4등에 입상하였다. 훗날 한동일 선생은 이 대회를 회상하며 겸손하게 자신은 3등밖에 못 하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투병으로 오랫동안 연습을 하지 못했다가 부산에 와서 조금씩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대회는 KBS에서 6.25 특집으로 제작한 다큐 <피아노>와 KNN에서 제작한 <피란 수도 1023>의 20번째 에피소드 “영도다리”에서 한동일 선생의 증언과 함께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953년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동가식서가숙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아들의 손을 잡고 마포에서 돈암동, 후암동, 종로 5가 등으로 이동하며 김성복, 이애내, 신재덕 등의 피아니스트에게 교습을 받게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기에 지인들은 무료로 피아노 교습을 시켜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차에서 아버지의 지인을 만났는데 미 5공군 사령부(지금의 서울대 의대) 강당에 가면 피아노가 있으니 거기서 연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후로는 매일 2시간씩 사령부 강당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한 미군이 다가와 일주일 후에 한국과 미국의 VIP를 위한 쇼가 있는데 한 곡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 행사 날 동일은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icioso)를 쳤다. 연주가 끝나자, 제5공군 사령관인 새뮤얼 앤더슨(Samuel E. Anderson) 중장이 통역사를 데리고 와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후원자가 되어서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한동일 선생은 이날을 1953년 9월 말 아니면 10월 1일로 기억하고 있다.
그해 10월과 11월에 앤더슨 사령관은 ‘한동일 장학 기금(Tong Il Han Education Fund)’을 모으기 위해 주한미군 기지 24곳을 도는 모금 연주회를 주선했다. 연주가 끝나면 사회자가 이 소년 피아니스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데 십시일반 도움을 주자고 이야기하면서 군인들에게 모자를 돌렸다. 병사들은 5센트, 10센트, 25센트를 내놓았고, 장교들은 몇 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이듬해 1월에는 일본 내 미 공군기지도 돌며 연주회를 하였다. 홋카이도의 공군병원에 연주하러 갔을 때 주최 측이 미국에서 유명한 VIP가 왔다고 15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VIP는 바로 위문공연을 온 배우 매릴린 먼로였다. 동일이 무대에 올라서 연주했는데 먼로의 방문으로 한껏 기분이 들뜬 군인들은 많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인 돈은 당시로서도 상당한 액수인 4,350달러였다. 앤더슨 장군은 개인적으로 돈을 지원하기보다는 스스로 힘으로 유학비용을 모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기획하였고 어린 소년이 자립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왔다. 줄리아드 음악원은 비극적인 전쟁을 치르고 막 휴전한 한국의 소년 피아니스트에게 오디션도 없이 입학을 허가하였고 전액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2막 - 줄리아드에서 세계로
1954년 배재중 1학년이던 한동일은 12살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에 병역미필자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허가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동일은 경무대로 초청받아 대통령 내외의 격려를 받았다. 어린 소년이 미국 줄리아드로 유학한다는 소식은 큰 화제가 되었고 5월 29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 고별 연주회가 열렸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먼 타국으로 떠나보내야 했기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어린 동일은 철없이 미국에 간다는 기대에 들떠서 마냥 기뻐했다고 한다. 1954년 6월 1일 동일은 임기를 마친 앤더슨 중장과 함께 프로펠러 군용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출발하였다. 4시간 30분을 날아서 도쿄에 도착해서 1박 하였다. 그리고 태평양 상의 웨이크 아일랜드, 존슨 아일랜드, 호놀룰루와 본토의 샌프란시스코, 포트워스를 거쳐 마침내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새 부임지로 가야 하는 앤더슨 중장과 작별하여 홀로 뉴욕행 기차를 탔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방학 기간이었는데도 한국에서 온 소년 피아니스트를 맞기 위해서 지도교수와 교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에 줄리아드의 오디션에서 동일은 바흐의 곡을 연주했는데 미숙한 면이 있었지만, 장학생으로서의 입학은 예정대로 이루어졌다.
그의 도착은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아서 뉴욕타임스, 데일리뉴스, 저널 아메리카 등에서 그의 도착을 기사로 내었다. 그리고 CBS의 유명 앵커인 월터 크롱카이트와 인터뷰하였고 인기 버라이어티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동양에서 온 음악 신동으로 소개되어 피아노 연주를 했다. 이때 받은 출연료 500달러는 유학 비용에 보태져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한동일이 ‘미국인 아버지’라고 부른 앤더슨 장군의 사전 준비 작업 덕분이었다. 뉴욕 생활 초기 몇 년간은 어머니와 이화여전 동기였던 소프라노 김자경의 뉴욕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자취생활 하였다. 처음에는 영어가 안 되니 6학년부터 시작했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된 후에는 8학년으로 진급하여 주중에는 세인트 힐다 사립학교를 다녔다. 토요일에는 줄리아드의 예비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지도교수는 러시아로 이민 간 네덜란드계 유대인 출신의 피아니스트 로지나 레빈(Rosina Lhévinne, 1880-1976)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영국 피아니스트 일로나 카보스(Ilona Kabos, 1893-1973)에게도 지도를 받았다.] 한동일 선생은 처음 지도교수에게 교습을 받을 때의 충격을 잊지 않고 이야기하곤 했다. 어린 제자는 쇼팽의 곡을 조금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연주하려고 ‘엄격하게’ 쳤다. 그러자 레빈 교수는 ‘음 하나하나를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며 부모가 자식을 어루만지듯 음악의 톤을 사랑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휴먼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지도교수의 말은 어린 동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레빈 교수를 통해서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완벽한 연주 기계가 되는 것이 목표였는데 음악을 잘하는 것은 단지 테크닉이 뛰어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며 소통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도교수의 제자 중에는 상급생으로 존 브라우닝(1955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자)과 반 클라이번(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이 있었고 이런 선배들의 연주를 듣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지도교수는 어린 동일에게는 엄마 같은 분이었다. 미국에 도착해서 실제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지도교수가 데려간 뉴욕필의 연주였다.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이었는데 그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지도교수는 종종 제자를 연주회에 데리고 갔는데 그는 카네기홀에서 루빈스타인, 길렐스, 호로비츠 같은 거장들의 연주를 듣고 얼마나 큰 감동과 영감과 배움을 얻었는지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음악의 위대함과 무게를 느끼며 어떻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음악으로 끌어낼까, 고민하게 되었다. 레빈 교수는 뉴욕필하모닉이 주최하는 젊은 음악가 콩쿠르에 입상하면 영화관에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제자가 우승하자 시네라마라는 특별한 영화관에 데려갔다고 한다. 이 대회에 우승함으로써 그에게는 카네기홀에 데뷔할 기회가 주어졌다. 1956년 4월 28일 ‘영 피플스 콘서트’에서 뉴욕필과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1악장을 협연하였다. 이 연주회에는 레빈 교수는 물론 앤더슨 장군까지 참석하여 격려하고 축하해주었다. 이 소식이 한국으로 전해지자 일간 신문들은 국위를 선양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축전을 보냈다.
이 시절 미국 내에서도 주목받는 소년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클리블랜드, 덴버, 인디아나 심포니 등에서 초청이 와서 연주 여행을 다녔다. 어린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청중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의 생활비를 벌고 미래를 위하여 돈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후원자인 앤더슨 중장은 연주회를 주선하였기도 했고 학비와 용돈이 장학재단의 특별 계정을 통하여 정기적으로 지급되도록 관리해 주었다. 그리고 여행할 때나 연주회와 같은 공식 행사에 갈 때는 반드시 정장을 제대로 갖추어 입도록 조언했다. 그러나 이처럼 주목받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삶은 외면적인 화려함과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매우 외로웠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어른들의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한동일 선생은 외로움에 힘들어했던 유학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외로운 소년은 매일 고국에 있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고 그 덕분에 오랜 외국 생활 중에도 한국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어려움과 위기는 줄리아드 음악원 3학년 때 나타났다. 자신의 음악성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훌륭한 연주가로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진다. 남들은 모두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칭찬하지만 정작 본인은 마치 바람만 가득 든 허풍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반 클라이번 같은 선배는 너는 이미 이 정도 높은 수준의 레퍼토리를 잘 연주할 수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피아노 연습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피아노 없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6개월 만에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청소년기에 경험할 수 있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방황 그리고 뛰어난 성인 연주자가 되기 위해 겪었던 위기의 시절이었다.
1958년 6월에는 극동지역 순회공연에 올라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고국에서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로 초청하여 장학금을 전달하며 격려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줄리아드에서 공부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도 함께 한다. 그는 시카고의 유명한 음악 축제인 라비니아 페스티벌(Ravinia Festival)의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다. 이 대회 예선에는 70여 명이 참가하였고 줄리아드와 커티스와 같은 음악 명문 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이 대회 본선에서 한동일은 또다시 1등으로 입상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경력으로 1962년 11월 19일 백악관에 초청되어 연주회를 가진다. 이 행사는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가 워싱턴에 있는 대사, 정부 각료 그리고 국무성 직원의 자녀들을 위해 주최한 청소년 음악회 프로그램이었다. 21살의 청년 피아니스트 한동일은 이스트룸에서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쇼팽의 녹턴, 드뷔시의 프렐류드, 스카를라티 소나타를 연주하였다. 언젠가 젊은 시절의 한동일이 푸에르토리코에서 연주할 때였는데 쇼팽의 발라드 1번을 들은 유명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가 일어나서 걸어오더니 그를 안고 ‘보기 드문 인재(rare talent)’라고 치하한 장면은 유명하다.
한동일 선생의 경력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한국인 최초의 국제음악콩쿠르 우승자라는 사실이다. 레벤트리트 경연대회(Leventritt Competition)는 1939년 법률가 에드거 레벤트리트를 기념하기 위하여 설립된 재단이 주최하는 국제적 명성을 가진 대회로 1940년 제1회 대회가 뉴욕에서 개최되었다. 현재는 이 대회가 중단되어 자료를 얻기 쉽지 않지만 1965년 10월 27일 자 뉴욕타임스를 보면 그 전날 카네기홀에서 열렸던 결승에서 줄리아드 음악원의 23세 한동일이 제24회 레벤트리트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40명이 참가한 예선은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준결승은 10월 25일, 결승은 10월 26일 화요일 카네기홀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결승에서 수준에 도달하는 연주자가 없으면 우승자를 내지 않는 대회로 유명하였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청소년 음악회’로 유명한 뉴욕필의 상임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이었다. 14명의 심사위원에는 윌리엄 스타인버그, 루돌프 제르킨, 게리 그래프먼, 조지 셀, 레온 플라이셔와 같은 쟁쟁한 피아니스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카네기홀의 자료를 검색해 보니 이 대회와 관련하여 한동일의 이름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6번’의 자료가 남아 있었다. 이 대회에서 연주했던 곡으로 생각된다. 언젠가 ‘봄’의 연주회가 끝난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동일 선생 옆자리에 앉게 될 기회가 있어서 이 대회에 관해 여쭤보았다. 결승에서 1등과 2등이 근소한 차이였는지 최종 우승자를 가리기 위해 베토벤 소나타의 가장 느린 악장인 2악장 아다지오를 연주해달라는 심사위원단의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두 번째 순서로 연주하는데 누군가 무대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심사위원장이 등장해서 연주를 중단시키고 올해는 우승자가 나왔는데 바로 당신 미스터 한이라고 발표하였다. 한동일 선생의 설명으로는 유명한 대회의 결승에 진출할 정도의 피아니스트라면 빠른 연주 실력과 화려한 테크닉은 기본으로 갖추었기에 느린 부분의 연주를 듣고 음악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판단해서 우승자를 가렸으리라는 것이다. 이는 레빈 교수가 어린 제자에게 조언했던 연주 철학의 내용, ‘피아노는 손가락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주하는 것’이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한동일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의 1967년 대회에서 19살의 정경화는 줄리아드의 갈라미안 교수에게 함께 지도받던 핑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한다. 한국의 젊은 연주가가 2회 연속으로 우승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낸다. 이 대회의 1954년 우승자는 레빈 교수의 제자였던 반 클라이번(Van Cliburn)이다. 그는 냉전 시대였던 1958년 소비에트연방의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수상을 기념하여 1962년부터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4년마다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 시에서 열리고 있다. 레벤트리트 콩쿠르가 1981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면서 이 대회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 콩쿠르가 되었다. 2009년 손열음이 2등에 입상하였고, 2017년과 2022년에 선우예권과 임윤찬이 우승하여 우리에게도 익숙한 대회가 되었다.
국제 콩쿠르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어릴 때부터 주목받은 피아니스트의 경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레벤트리트 경연에서 우승하고 며칠 뒤인 1965년 10월 31일 CBS의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12번을 연주하였다. 11년 전 처음 출연하였을 때보다 10배나 오른 출연료도 그의 위상을 말해주었다. 이후 1968년 줄리아드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학업을 계속하면서 연주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뉴욕 필하모닉, 시카고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런던 필하모닉, 로열 필하모닉, 국립 스코틀랜드 오케스트라, 할레 오케스트라, 오슬로 필하모닉, 러시아 국립 심포니, 폴란드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 부다페스트 라디오 심포니 등과 협연하며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 25개국을 순회하며 연주한다. 어릴 때부터 십수 년간 연주하며 어떤 해는 80여 회의 연주를 강행하다 보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갔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으니, 음악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연습하다 보니 때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968년 런던-쾰른-에든버러-글래스고-벨파스트-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연주 여행을 하는데 마치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돌아다니는 세일즈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베를린 연주회에서 쇼팽의 소나타 3번을 치는데 일부러 건반에서 틀린 음을 눌렀다. 내적 갈등이 폭발하며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런던의 숙소로 돌아와서 누웠는데 갑자기 천장과 벽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공황장애가 온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숙소에서 그 상태로 2~3주간 쓰러져서 지냈는데 한 음씩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결심을 하였다. 1968년 어느 날 런던 숙소의 1층으로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인디애나대학 음대에 근무하는 지인이 ‘상주 음악가’(Artist-in-residence)라는 자리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바쁜 연주 여행 스케줄에 매몰되어 음악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자신을 구원할 좋은 기회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였다.
3막 - 연주자에서 교육자로
28살에 미국에서 음대의 규모가 가장 큰 인디애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한동일은 여기서 새로운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에서 얻는 기쁨이었다. 석사나 박사과정에는 나이가 훨씬 많은 학생도 있었지만, 권위를 내세우는 일방통행식의 교육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함께 연구한다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사제간에 가족과 같은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함께 음악을 하는 동료들도 있어서 오랫동안 나그네처럼 홀로 걸어왔던 삶의 외로움을 덜 수 있었다. 화려한 대도시 뉴욕에 살지만 창밖을 내다보며 왜 나는 친구도 없이 늘 혼자일까 생각하며 외로움에 상처받았던 마음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다. 한 선생은 그것을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라고 표현하였다.
안정적인 생활이 시작된 인디아나 대학 시절부터는 연주회 수를 1년에 25회 정도로 줄였지만 교육과 행정 부담이 커서 개인적으로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그러다가 연봉은 50% 올려주고 교육 부담은 줄여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1971년 일리노이 주립대로 옮겨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78년에는 새로운 제의가 들어와서 노스 텍사스 주립대로 옮긴다. 1986년 3월에 출연한 KBS의 대담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을 보면 박사과정 9명, 석사과정 6명, 학사과정 2명의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담에서 앞으로 가능하면 자주 한국에 와서 한국의 학생을 지도하여 국제적인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친다. 1987년 보스턴대로 옮겨서 2005년 미국에서의 교수직을 마감할 때까지 3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다. 여러 번 학교를 옮긴 것은 연주가로서의 명성뿐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연주회와 연계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마스터 클래스와 워크숍을 열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음악감독으로 피아노 페스티벌을 주관하기도 했다.
2004년 6월 1일 저녁 예술의 전당에서 도미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이날의 연주회는 본인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 특별한 행사였다. 서울시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황제)을 협연할 때 오케스트라의 맨 뒤쪽에서 팀파니를 치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인 한인환 선생이었다. 아버지는 1947년 서울시향의 창립 단원으로 1970년 은퇴할 때까지 팀파니스트로 활동하였다. 62세의 아들과 91세의 아버지가 함께 연주한 작품은 아들이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처음으로 실제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였던 바로 그 곡이었다.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했던 아버지와 여러 고난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아들은 연주가 끝나고 뜨겁게 포옹하였다.
이날의 연주회는 다음 해부터 한국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후학을 지도하기로 결심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신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어렵던 시절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좋은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지만 많은 한국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외국에서 교육받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고국의 후학들을 지도하는데 좀 더 노력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한 선생은 2001년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울산대 음대의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했고 보스턴대에서 퇴직한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음대 학장을 맡았다. 그 후 2008년부터 순천대 석좌교수를 4년간 역임하였으며 일본 히로시마의 엘리자베스 음악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지냈다. 2012년을 끝으로 공식적인 교직 생활에서 은퇴하였다.
한동일 선생이 귀국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많은 사람들이 수도권의 좋은 음대를 놔두고 왜 지방대학으로 갔는지 의아해하였다. 그 이유는 여건이나 환경이 좋은 대학에서보다는 역사도 짧고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지 않은 지역의 대학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즐거움과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을 잘 가르쳐서 세계 무대로 내보내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소명 의식과 함께 선생이 늘 가져왔던 교육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하다. 선생은 늘 음악적 기교보다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가여야 한다고 강조했고 학생들이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자신의 소리를 찾도록 함으로써 개개인의 개성과 독창성을 존중하였다. 또한 한동일 선생은 제자들에게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깊은 가르침도 남겼다. 음악가는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연주를 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겸손함을 배우도록 가르쳤다. 선생의 교육관은 음악을 통해 삶을 배우고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여 이를 바탕으로 진정성 있는 예술가로 성장하는 것에 있었다. 기교적 완벽함이 돋보이는 기술자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라는 그의 가르침은 참스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4막 – 다시 고국으로 그리고 겸손과 비움의 미학
한국에서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한동일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가족도 있고 지인들도 많은 미국에서 가끔 연주회도 하면서 여유 있게 노년을 보낼 계획을 세운 것 같다. 그러나 2018년 한국으로의 영구 귀국을 결정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옛날에 살던 동네 근처, 홍난파 생가에서 멀지 않은, 장독대가 있는 한옥의 방 두 칸을 빌려 생활하였다. 그리고 국적 회복도 신청하였다. 공식적으로 다시 한국인 한동일이 되었다. 걷기도 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녔다. 가끔은 지방으로 여행을 다녔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고, 버스를 타고 속초도 가고, 배를 타고 울릉도도 가보았다. 부산, 창원, 대전 등의 대도시는 물론이고 안동, 함양과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공연하였다. 한동일 선생은 문화공간 봄에서도 세 번의 음악회를 가졌다. 2019년 3월의 연주회 외에도 2020년 9월과 2021년 7월에 제자와 함께 연주하였다. 소규모의 문화공간은 사실 선생의 명성에 걸맞은 수준의 연주비를 드리기 어렵다. 그런데도 선생은 기꺼이 하우스 콘서트에 응했고 피아노와 이야기를 통해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고 싶어 했다. “이제 저의 카네기홀은 지역에 있어요”라는 선생의 말은 그런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2022년 한동일 선생은 인천 석모도의 삼산 승영중학교에 전교생 70여 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는데 한번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는다. 전교생이 강당도 아닌 체육관에서,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피아노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아이들의 모습에 감동한 선생은 광화문 문화포럼 오지철 회장과 회원들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포럼 회원들의 모금과 도움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마련하여 2022년 6월 8일 학교 강당에서 기증식을 가지고 콘서트를 열었다. 한동일 선생과 제자 이혜은 교수가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의 곡은 그곳에 모인 학생들과 참석자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 같은 해 12월 9일에는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 공연에서 협연하였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동일 선생의 인품과 삶에 대한 태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에도 소탈하고 겸손한 태도로 누구에게나 따뜻한 배려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필자가 가까이서 본 선생은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지닌 분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와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머니와 부모님의 영향과 신앙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선생은 ‘조금씩 삶을 정리해 둬야겠다’거나 ‘여한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선생은 생전에 이루고 싶은 두 가지 꿈이 있었다. 하나는 어릴 때 떠난 고향집, 함흥시 일출동 82번지에 다시 가보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북한을 거쳐 트랜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파리까지 가는 것이었다. 이 희망에는 사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와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반대 방향으로 여행해 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루빈스타인의 동아시아 순회공연은 1928년 상하이, 경성, 도쿄에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이 두 가지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고 말았다.
마무리 - 기록과 기억
이 글을 준비하며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인터넷과 유튜브에 인터뷰와 대담, 연주 자료들이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한동일 선생을 직접 뵌 것은 몇 번밖에 되지 않아서 선생에 대한 기억은 제한적인 필자의 경험에 근거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선생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더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선생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료를 모은다는 이야기가 들리는데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 개인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되고 보존되어 자료로 남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살펴본 몇 가지 디지털 자료를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동일 선생이 근무했던 노스 텍사스 대학의 디지털 도서관에는 1954년 앤더슨 장군이 포트워스에 도착하는 장면, 미국에 도착한 소년 한동일이 카우보이모자와 부츠를 선물 받고 좋아하는 모습, 한 미국인과의 인터뷰 장면 그리고 피아노 연주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 자료가 남아 있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피아노 연주 음원과 연주회 녹음 자료도 보관이 되어 있다. 뉴욕의 공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는 로지나 레빈 아카이브가 있다. 거기에는 한동일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카네기홀 자료실에도 연주 관련 자료가 있고 보스턴대학에는 교수 연주회(Faculty Recital)의 자료가 있었다. 혹시라도 선생에 대한 아카이브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한동일 선생이 남긴 가르침과 삶의 철학은 앞으로도 많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며, 그분의 따뜻한 인간미와 겸손함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문화공간 봄은 5월에 선생의 제자가 참여하는 ‘한동일 추모 음악회’를 두 차례 열 계획이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류지석 대표
<문화공간 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