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나무
-베이비부머
이 광
그 시절 민둥산에 땅내 맡고 크는 동안
바지런히 꽃 피우고 아등바등 뻗은 뿌리
산기슭 웬만한 곳엔 활개 활짝 펼쳤다
옛길은 눕혀둔 채 새로 난 큰길 따라
너 가고 나도 가고 수십 년이 훌쩍 갔다
사는 게 마음 같잖아 시나브로 꺾인 기세
흰 구름 피어오른 신록 아래 쉴 짬 없이
오월 이 꽃향기 다 잊고 살아왔다
무엇에 이끌렸을까 앞만 보며 내달린 길
이파리 한 줄기 따 가위바위보 하던 날들
소꿉동무 이름마저 한 잎 한 잎 흩어졌다
제 뿌리 건사하느라 고목이 된 너와 나
어린 시절 오월이면 바람에 실려 오는 아카시 향이 참 좋았다. 도시에서도 야산 근처만 가면 다가오던 그 향기를 언제부터 쉬 접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콩과 식물인 아까시나무의 수명이 백 년 정도로 오십 년쯤 지나면 쇠퇴한다는 내용을 어느 글에서 읽고 그래서 그런가 하며 짠한 느낌이 들었다. 그 속에서 필자와 같은 세대인 베이비부머들 모습이 얼비쳤기 때문이다.
베이버부머 세대의 유년기엔 아까시나무가 산림 녹화와 산사태 방지를 위해 대량으로 심어졌다. 번식력이 좋아 민둥산도 빠르게 숲을 이룰 수 있었고 꿀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밀원이 되어주었다. 이천년대 이후 아까시나무 대신 경제수종으로 대체하는 식재가 활발해졌고, 또한 소나무 등에 밀려 이선으로 물러나며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진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 셈이 되었다.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커서 낳은 아이의 자라는 모습을 보며 고목으로 가는 베이버부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앞만 보고 달린 길이었지만 잊은 듯 살아온 가슴속엔 깊이 간직한 꽃향기가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많은 꿀을 내주었고 이 강산을 푸르게 했고 또한 사태 지는 것을 온몸으로 막으며 제 뿌리를 건사해오지 않았는가.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