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둘러싼 이른바 ‘환단고기 환빠 논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논쟁은 겉으로 보기에 대통령의 역사 인식, 더 나아가 유사역사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의 지적과 문제 제기가 심각하게 오도되고 왜곡되면서 발생한 측면이 훨씬 크다. 이번 논란은 한 정치인의 발언이 어떤 방식으로 탈맥락화되고, 어떻게 공론장에서 다른 의미로 소비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환단고기의 사료적 진위나 역사적 권위를 인정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역사 인식의 균열, 특히 식민지 시기 이후 형성된 제도권 역사 서술과 대중의 감정 사이의 괴리에 대한 질문에 가까웠다. 왜 많은 시민들이 공식 역사 서술에 거리감을 느끼는가, 왜 검증되지 않은 서사가 반복적으로 호소력을 갖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이는 ‘무엇이 진짜 역사냐’는 선언이 아니라,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가’라는 구조적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은 곧바로 단순화되었다. 대통령의 발언 일부가 잘려 나가고, ‘환단고기’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만이 부각되었다. 맥락은 사라지고, 해석만이 남았다. 그 결과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옹호했다”, “유사역사를 인정했다”는 식의 프레임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통령이 하지 않은 말이 대통령의 입장으로 둔갑했고, 질문은 신념으로, 문제 제기는 지지 선언으로 바뀌었다. 논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론과 온라인 공론장의 책임도 작지 않다. 긴 설명과 복합적 맥락은 클릭을 만들지 못한다. 대신 오해의 소지가 큰 문장 하나, 논쟁적인 단어 하나가 전체 발언을 대표하게 된다. 특히 대통령의 언어는 늘 의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해석은 언제나 가장 극단적인 방향으로 기운다. 이번 논란 역시 그러한 구조 속에서 증폭되었다.

역사학계의 반응 역시 이 왜곡된 프레임의 영향을 받았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환단고기의 비학문성과 위험성을 지적한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환단고기가 실증적 사료 비판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의 합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비판의 상당 부분이 대통령의 실제 발언이 아니라, 오도된 해석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역사로 인정했다는 전제를 깔고 이루어진 비판은, 결과적으로 ‘허공의 주장’을 겨냥한 논박이 되었다.

이로 인해 논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 자체는 실종되고, 환단고기를 둘러싼 찬반 구도만이 남았다. 학문적 비판은 정치적 경고로 읽혔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지지와 반지지의 진영 대결로 전환되었다. 그 과정에서 ‘환빠’라는 낙인어가 난무했고, 논쟁은 사실 검증이 아닌 조롱과 비난의 언어로 채워졌다.

특히 ‘환빠’라는 표현은 논쟁을 닫아버리는 역할을 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상대의 발언은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문제는 대통령의 발언을 방어하는 일부 지지층이 실제로 환단고기를 감정적으로 옹호하면서, 오도된 프레임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대통령의 본래 문제의식과는 별개의 현상이다. 대통령이 제기한 것은 신화를 사실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왜 신화적 서사가 반복적으로 힘을 얻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논쟁은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놓쳤다. 왜 제도권 역사학은 대중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했는가. 왜 학문적 성과는 사회적 언어로 번역되지 못했는가. 왜 많은 시민들이 검증되지 않은 서사에서 위안과 자부심을 찾게 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다. 그러나 환단고기 논쟁은 이 질문들을 가려버렸다. 논쟁은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로 축소되었고, 구조적 성찰은 설 자리를 잃었다.

물론 대통령의 발언에는 언제나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최고 권력자의 언어는 그 자체로 정치적 파급력을 갖기 때문이다. 발언이 오해될 여지가 있다면, 보다 명확하고 정제된 표현이 필요하다. 그러나 발언의 책임과, 그 발언을 왜곡해 논쟁을 증폭시키는 책임은 구분되어야 한다. 이번 사안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대통령의 ‘역사관’이 아니라, 대통령의 발언이 소비된 방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논쟁은 유사역사의 위험성보다 공론장의 취약성을 더 분명히 드러냈다. 맥락을 읽지 않는 사회, 질문을 선언으로 바꾸는 언어 환경, 진영 논리에 의해 모든 발언을 재단하는 구조 속에서 어떤 문제 제기도 쉽게 왜곡될 수 있다. 환단고기 논쟁은 그 한 사례에 불과하다. 대상이 이재명 대통령이었을 뿐, 같은 방식의 논란은 언제든 다른 인물과 다른 사안을 통해 반복될 수 있다.

결국 이번 논쟁에서 가장 크게 손상된 것은 토론의 가능성이다. 역사학계와 정치권,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은 사라지고, 서로를 향한 공격만이 남았다. 대통령의 지적이 오도되면서 시작된 논쟁은, 그 오도를 바로잡지 않는 한 결코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둘러싼 이번 논란은 우리 사회에 하나의 과제를 던진다. 우리는 과연 발언의 맥락을 끝까지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들이고, 오해를 바로잡으며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공론장을 갖추고 있는가. 환단고기 논쟁은 그 자체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이 보여준 왜곡의 메커니즘이며, 그 메커니즘을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바로잡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다.

역사는 신화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정치적 오독의 희생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번 논란이 대통령의 발언을 다시 정확히 읽고, 그가 던진 질문을 정면에서 논의하는 계기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가짜 논쟁을 소모적으로 통과시킨 셈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정이 아니라 독해이며, 공격이 아니라 성찰이다.

박철 목사

◇ 박철 : 감리교 은퇴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시인. 생명과 영성, 사회적 실천을 주제로 글을 써왔다. 매일 자작시 한편을 지인들과 나누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자유인의 고백』,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낙제 목사의 느릿느릿 세상 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