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32. 을식과 미호

세상에 나만큼 이 세상을 치열하게 투쟁하며 생존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지금 여기 들어 와서도 이 세상 역사를 쭉 둘러 봐도 없을 거 같은데… 나는 그야말로 신분을 깨부수며 치고 올라가는 생존술의 대가이자 도사라 불릴 수 있어. 내가 날 평가해도 신통하고 기특하고 대견하며 대단하고 엄청나. 고착화된 질서를 타파하며 살아온 나의 테크닉을 이 세상 사람들은 알아줘야 해. 나란 사람을 연구하면 모순 덩어리인 이 세상을 어떻게 헤치며 살아야 할지 답이 나와. 사람들은 날더러 간신 중에 최고 최악의 간신이라 부르던데… 그래 나 간신 맞아. 간신(奸臣)이고 간신(姦臣)이었지. 간사(奸詐)하고도 간사(姦邪)했었지. 내가 봐도 참으로 정말로 리얼리 기막힌 처세술이었어. 처세(處世)! 세상에 나란 인간을 어떻게 처하게 할지 나는 힘차게 발버부둥치며 살았어. 너 나를 아나! 생긴 건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좀 맹해보이기도 하고…

처음 본 사람한테 좀 버릇이 없네.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야? 예의를 갖추시오. 내 아무리 순한 황후이며 황제였다고 해도 너처럼 무례한 남자한테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야. 어디 처음 보자마자 지 잘난 체 실컷하더니 얌전한 나한테 예쁘다느니 맹하다느니 겉모습만 보고 말걸 수 있지. 고얀지고! 네 이놈...

앗! 실수. 미안해. 내가 잠시 내 멋에 반해서. 자기도취에 빠졌었어. 내가 원래 남들 심중(心中) 살피는데는 최고일류급인데 좀 빗나갔어. 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오. 여자인 네가 황후이자 황제라고 했지? 황제 폐하! 통촉(洞燭)하여 주시옵소서. 꿰뚫어(洞) 불밝혀(燭) 주시옵소서. 소인이 실례를 범했사옵니다.

오냐. 이제야 좀 정상이 되었네. 자! 이제 말트자. 허락하마.

그래도 되겠어. 그래 고마워. 너 참 마음이 넓은 여자네. 용모가 우아한 만큼 정신도 우아한 걸까? 그대 참 아름다고 괜찮은 여자네. 네가 여황제였다고 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겠어.

그건 그래. 맞는 말이지. 내가 좀 우아하고 괜찮은 여자였지. 그런데 너는 뭐가 그리 네가 대단하다고 아까 나한테 건방지게 말했던 거지? 도대체 넌 어떤 남자였는지 간단하게 말해봐.

내가 살던 나라에서 천민이며 첩이었던 엄마의 자식은 사람 취급을 못받던 세상이었어. 서얼(庶孼)이라고 하는데 나는 평민의 아들인 서자도 아니고 천민의 아들인 얼자였어. 나한테는 그냥 X같은 나라였지. 신분상승은 꿈에도 꾸지 못했을 때야. 그럼에도 나는 신분상승의 꿈을 기어코 이루어내고 말아. 천민이었던 나는 양반들이나 하는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지.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

네가 대단하긴 했겠지만 나랑 비교하면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일 껄. 이 여자 나로 말할 거같으면, 난 하녀에서 전쟁포로로, 전쟁포로에서 창녀로, 창녀에서 공작부인으로, 공작부인에서 황제의 정부로, 황제의 정부에서 황후로, 황후에서 황제까지 된 나야? 네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몰라도 나랑 비교하니 어때?

와우! 너 대단하네. 나처럼 신분상승을 한 건 똑같은데 신분상승의 급이 다르네. 하녀가 황제까지 되었다고? 엄청난 여자일세. 난 겨우 황제도 아닌 왕이 내려주는 벼슬을 얻은 거에 불과한데. 그런데 너 그렇게 네가 하녀에서 황제까지 가는 동안 네 치열한 노력으로 그게 된 거야? 내가 보기에 넌 그럴 위인은 아닌 듯한데.

역시 네가 정곡을 찌르네. 나는 치열한 노력파가 아니야. 더군다나 어떤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는 여자도 아니야. 나의 생존을 위해 누굴 모함하고 모략하는 스타일도 아니야. 난 그저 이쁘고 우아하고 품성좋은 여자야. 그런데 어쩌다가 하녀에서 황제까지 되었어. 내가 어찌어찌 작업을 해서 된 게 절대 아니야. 살다보니 저절로 그리 되었어. 난 그냥 공작부인이나 황제의 애인까지가 딱 나한테 적합한 자리였어. 황후까지는 그렇다쳐도 내 주제에 황제라니!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

역시, 그렇구나. 내가 생각해도 그럴 거같았어. 너한테선 그저 선한, 좀 안좋게 얘기해선 맹한 여인의 향기가 나는 거같아. 맹하다는 표현을 오해하지마. 사람이 남을 해치려는 그런 나쁜 의도가 없다는 뜻이야. “선하다 ≒ 맹하다”. 대충 그런 의미라고 보면 되. 그런네 나는 그러지 않았어. 나는 선하지 않았어. 악했어. 맹하지 않았어. 독했지. 나는 나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어.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하면 난 뭐든지 다했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 방법으로 비열한 방법으로 치열하게 처절하게 맞서 헤치며 싸웠어. 너 혹시 나직경이란 책 알아? 너처럼 선하고 순하고 맹한 여자가 알 리가 없지. 아마도 이 책은 이 세상 수억 가지의 책들 중에서 최악의 책이야. 책 제목은 나직경(羅織經)이라고 점잖은데 책 내용을 보면 최고로 악랄한 최악경(最惡經)이야.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나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이나 18세기 청나라 말기에 나온 후흑학(厚黑學)은 나직경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으로 순수 아동도서에 불과해. 나직경은 단도직입적으로 타인 모함 지침서야. 정적을 제거하는 비책을 담은 책이야. 이 책은 7세기 중국 당나라 무측천 시대에 만들어졌지. 성이 무(武), 이름이 조(照, 曌)인 무조는 일개 후궁에서 황제가 된 여인이지. 측천무후에서 황제인 무측천이 된 어마무시한 인물이야. 측천(則天)은 무조 자신을 높여서 나타내는 별칭이야. 호라고도 볼 수 있을려나 모르겠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성을 따서 무씨의 주나라인 무주(武周)를 창업한 여인이야. 그런데 그녀가 황제가 되기 전에 황제는 다 이씨였지. 당나라 고조 이연, 나중에 측천무후의 시아버지가 되는 태종 이세민, 측천무후의 남편이었던 고종 이치, 측천무후가 황제로 앉힌 중종 이현과 예종 이단. 그러다 여자인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었으니 그 당시에도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중국사에서 여자 황제는 무측천이 유일해. 여자가 황제가 되다보니 남자들이 어땠겠어. 무측천 앞에서는 고분고분했겠지만 뒤에서는 벼라별 험담을 하지 않았겠어. 특히 황족이던 이씨들은 더욱 그랬겠지. 그러니 무측천에겐 정적들이 많았어. 이 때 정적을 제거하는 비책인 나직경이 무측천한테 올라왔는데 그너에게는 딱 맞는 책이었어. 명분이 없어서 그렇지 제거하고 싶은 놈들이 많았거든. 무측천은 이 기발한 책을 쓴 내준신이란 자한테 그 숙청 업무를 맡겼어. 그 자는 책에 쓰여진 대로 실행하며 무측천의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지. 죄는 없어도 계략을 써서 모략하고 모함하며 음모를 꾸미고 권모술수를 쓰고 날조하고 조작하고 기만하고 밀고하고 심문하고 고문하고 심리적 신체적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잔혹한 형별을 내렸지. 그렇게 하기 위한 최악경이 나직경이야. 경(經)은 무슨, 경이라고 하기에 전혀 맞지 않는 무서운 술책서야. 죄가 없더라도 한 번 찍히며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도록 정적을 제거하는 섬뜩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지. 이 책 사본에 대한 주석과 설명을 단 최근의 책 제목은 모략의 즐거움이야. 어떻게 모략이 즐거울 수가 있지. 사실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어도 그 책에 담긴 걸 그대로 고대로 실행한 장본인이야. 나직경의 저자는 무측천이 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숙청을 실행했지만 나 을식은 그 어느 든든한 빽도 없이 오직 내가 꾸민 계락으로 정적을 제거했어. 정적을 제거한 이후에 나는 최고권력자인 왕의 신임을 받았던 거지.

너 정말 능력자였네. 너 때문에 제거된 사람들한테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였겠지만 너 자신한테 발휘한 능력은 정말 대단하네. 나는 너처럼 밑바닥에서 올라간 건 비슷하지만 나는 너처럼 살지 않았어. 나는 모략도 모함도 몰라. 나는 몰라요. 난 그저 순진하고 순수한 여인이었을 뿐이야. 미모가 뛰어났다지만 품성이 좋은 편이었어. 그래서 남자들이 날 좋아했을 거야. 이쁜데다가 마음씨까지 부드럽고 편한 대화가 되니까 말이지. 그러다 나도 모르게 황제가 되었어. 어쩌다 황제인 ‘어황’이 바로 나야. 나는 황제가 되고 나서도 권력욕이 없었어. 황제라고 하지만 나는 시체(時體)말로 바지사장같은 치마황제였을 뿐이야. 겉만 황제이고 모든 일은 다 남자 신하들한테 맡겼어. 황제는 나한테 맞는 자리가 절대 아니었어. 사람이 타고난 대로 살아야 하는데 느닷없이 뜬금없이 황제가 되었으니 잘 될 리가 있겠어. 결국 나는 황제 자리에 앉은지 2년 만에 죽고 말아. 내 나이 43세 때였어.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에 황제로서 행사에 참가했다가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죽었어.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난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이고! 이쁜 착한 미호 불쌍해라. 43세에 죽다니! 너처럼 착한 사람이 오래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불공평해. 악한 자가 오래 사는 경우가 많아. 나도 나한테 당한 자들에겐 악한 자일 텐데 나는 70을 넘겨 살았어. 나 살던 시대에는 장수한 편이지.

나도 너처럼 오래 살고 싶었어라. 그런데 말이지. 권력이란 게 참 요상한 거야. 나는 착할 정도로 순진하고 순수했는데 나 다음에 이어지는 내 후세 여자 권력자들은 나를 닮지 않았어. 나처럼 순하지 않았어. 그래서 난 여기 이 곳에서 가끔 나도 권력욕이 나의 후세들처럼 있었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곤 하지.

하녀 → 전쟁포로 → 창녀 → 공작부인 → 황제의 정부→ 황후를 거쳐 갑자기 황제가 된 순진하고 순수했던 여인

무측천도 여자 황제인 여제고 너도 여제고 다 똑같은데 어떻게 서로 그렇게나 다를 수 있지. 무측천은 권력쟁취와 유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해야 하고 하고마는 여자였어. 자신이 낳은 어린 딸까지도 죽였다는 의혹이 있고,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측천무후가 죽였다는 말이 맞아. 그야말로 잔혹함에서는 원탑급으로 무자비(無慈悲)한 여자였지. 죽을 때는 자신의 묘비에 아무 글자도 넣지 말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무자비(無字碑)를 남겼지. 그런데 너는 황제이면서 권력이란 걸 몰랐다는 거잖아?

권력! 난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았어. 그냥 난 이쁜 여자로서 착한 여자로서 살다가 난데없이 여제가 되고, 여제가 되고 나서 권력행사를 한 적도 없고1, 그러다 죽고, 내 신세 가련해. 불쌍해. 그런데 말이지. 내가 뿌린 여자의 기운 때문인지 최초의 여제인 나 죽고 나서 여인천하가 되. 조카 딸이 10년 황제를 하고 내 딸이 20년 황제를 했지. 이후 황제였던 내 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놈이 20년 동안 황제 뻘짓을 했지. 그 황제 놈은 전쟁 중에 적군을 도와주는 기상천외한 일을 벌인 또라이였어. 적군의 왕을 평소 존경했었다나 어쩐다나 하는 이유로... 참 나, 다 이겨놓은 전쟁을 그 또라이 황제 놈 때문에 망치고 말았지. 결국 그 놈의 마누라가 그 병신같은 남편이 황제 짓하는 꼴을 못보고 쿠테타를 벌였지. 그리고 황제가 되었는데 그녀는 내 이름을 따서 2세가 되었어. 나 미호는 1세고 그녀는 미호 2세야. 31년 동안 재위에 있었지. 여자 황제(皇帝) 일을 잘 해서 그냥 여제가 아니라 대제(大帝)라 불리지. 훌륭한 황제였어. 아무튼 나랑 별 피도 안섞인 그녀가 왜 내 이름을 따서 미호 2세라 했을까? 아마도 후세에 나에 대한 평판이 좋았던 거같아. 사실 내가 악한 짓을 벌인 게 하나도 없거든. 근데 왜 이렇게 밖이 어수선해. 을식아, 좀 알아봐.

박기철 교수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