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죽고 잡혀가고(2)
그렇게 두 집이 가까이 지내면서 나이가 한 살 차이라 그나마 가까이 지내던 남숙씨가
“희한하제. 누가 그래 시키는 것도 아닌데 사촌 간에도 꼭 있는 놈은 있는 놈끼리 잘 지내제?”
남부럽지 않게 자랐지만 성인이 되고 처자식을 거느리며 중년에 접어들자 하나같이 형편이 좋지 못한 사촌들, 그중에서 종손이자 회장을 맡은 헌택씨나 부인 숙남씨에게 수군거리면 사람 좋은 헌택씨는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면서 그냥 허허 웃었다. 그러나 좀 더 젊고 아직도 젊은 날의 괄괄한 성격이 남은 현관씨나 화룡씨는
“순이누나사 원래 성격이 무뚝뚝하다 치고 가서방 저기 언제부터 높은 사람이 되고 밥술이나 뜬다고 저 유세야?”
하고 수군거렸는데 그 이유는 영 엉뚱한 데 있었다. 형제 계를 구성하고 꽤 오랫동안 해룡씨가 총무를 맡았는데 회의가 끝날 때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노래방이나 가지.”
양정시장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 만큼 남녀가 노래방에 가서 한두 시간씩 놀았는데 나중엔 여자들이 차츰 빠지고 남자들끼리만 가면 의례 열찬씨나 소방관이던 헌범씨가 양주를 한 병 내거나 술값을 내곤 했다. 그런데 모임이 10년이나 계속된 뒤에 총무를 한 번 바꾸기로 하고 영순씨가 맡았는데 해룡씨에게 회의 장부를 달라니까 장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10년간 회비를 받고 찬조금을 받아 식사와 여행 등 경비를 쓰고 길흉사에 부조를 한 기록은 어디 있냐는 말에 형제들끼리 모여서 밥이나 먹고 헤어지는 모임에 무슨 큰돈이 오고가고 굳이 장부까지 할 필요가 어딨냐는 것이었다. 기가 차서 회장 현택씨에게 이야기를 하니
“허, 그런가? 해룡이 그 사람이 왜 그런가?”
하고 벌쭉 웃었다. 하도 이상해 남숙씨, 미혜씨, 회장부인 숙남씨를 비롯한 여성회원들이 모여 내용을 밝힌 결론은 회의를 마치고 헤어지면 날마다 세 사람이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오는데 그 셋이 당시에 사업이 부진해 늘 용돈이 궁한 처지에 그렇게 흥청망청 먹고 마실 처지가 아니니 결론은 자명하다는 것이었다. 열찬씨나 헌범씨가 돈을 내지 않으면 그 때, 그 때 남은 회비로 지출을 한 것이라고. 회장, 총무가 작당이 되서 저질렀으니 뒤탈이 날 것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날 이후 달다 쓰다 말 한마디도 없이 그저 벌쭉벌쭉 웃기만 하는 회장 현택씨나 가만히 눈을 내려 감고 똥구멍으로 숨을 쉬는 해룡씨의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더더욱 ‘아니 4촌간에 계를 하면서 형편 좀 되는 사람이 술을 사는 거는 당연한 거고 돈은 없고 술은 먹고 싶으면 좀 마실 수도 있지. 어데 돈에 이름이 써진 것도 아니고’ 도로 볼멘소리를 하는 현관씨와 싸우거나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계를 깰 수도 없었다. 아예 새 장부책을 사다 회원명부와 연락처, 회칙과 길흉사 부조기준을 명시하고 회비출납을 정확히 하니
“영순아, 오늘은 그냥 가나?”
회의를 마치면 회장 헌택씨가 넌지시 물어도 들은 척을 않자
“가서방, 오늘 딱 한 잔 어때?”
하는 바람에 어쩌다 한 번씩 어울리긴 해도 간단하게 한 잔을 사고 술 몇 병을 더 얹어 계산을 한 뒤에 먼저 돌아오곤 했다. 같이 어울리면 밤을 새워서라도 마실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촌들을 보고 미혜씨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평소 미혜씨의 신세를 지면서도 늘 그런 자신의 처지에 불만인 남숙씨는 ‘니는 있는 놈이라서 없는 놈 심정을 모른다.’고 괜히 성질을 내면 영순씨는 성장과정이나 사회변화에 원인이 있지 그 사람들의 천성이 그런 건 아닐 것이라는 모호한 의견을 냈다.
언양에서도 제일 벽지, 산돼지 하고 발맞추고 논다는 소호에서 빨갱이가 겁이 나서 부산으로 내려와 당시 부산의 최외각이자 잠깐 동안 포로수용소까지 있었던 양정의 산비탈에 하꼬방을 짓고 8도 가난뱅이가 다 모이는 양정시장에 내려가 난전을 펴고 하루하루 살아오면서 다행히 재산은 조금씩 모았으나 아이들을 돌보거나 가르치는 데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한 부모들이 나중에 상당한 돈을 벌어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살림까지 내어주었으나 하나같이 사업을 하네, 장사를 하네 하고 겉멋만 부리다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돈 걱정 없이 살던 버릇이 남아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가시나 니는 속도 넓다. 그냥 깨알받고 술이나 좋아하는 놈팽이라서 그렇지. 그럼 속 안 썩히는 이 서방 같은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란 말이가?”
“아이지, 워낙 고생을 많이 해서 그만한 간도 없는 거지.”
하면
“가시나들, 저거끼리 저거 남편 소쿠리뱅기 태우고 지랄이야.”
넉넉하지도 않은 데다 남편과 사이도 원만하지 않은 남숙씨가 또 볼멘소리를 하곤 했다.
“그래 오늘 처형은 좀 어때?”
날마다 병원에 가서 두어 시간씩 놀아주고 오는 영순씨에게 전화를 하면
“오늘은 기분이 좀 나은지 밥도 잘 먹고 이야기도 잘 하더라. 그러다가 난데없이 둘째 아들 승관이이야기가 나와서 또 울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장남 승만씨와 달리 공부에 취미가 없던 차남 승관씨는 마흔이 넘도록 장가도 가지 않고 몇 번이나 사업을 벌려 그 때마다 실패를 하고 요새는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고 했다. 사기죄로 잡혀가느니 신용불량자가 되느니 하는 바람에 그 경우 바른 예소의씨가 울며 겨자 먹기로 막아주기를 여러 번, 번듯한 상가건물을 한 채나 날리고 집에 있는 현금도 거의 다 들어가 이자수입까지 줄어 그 많던 살림의 절반은 축냈다고 했다. 어떻게 집에만 들어오면 죽기 전에 신용불량도 해소하고 지금 동거중인 여자와 식도 올려주고 싶은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데 지난 추석 때 잠깐 들렸을 때만 해도 자신이 아직 피둥피둥 살이 찌고 힘이 넘치던 때라 제 어미가 이렇게 심각한 줄을 모를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짜노? 큰일이네.”
“형부가 찾아 나섰으니 혹시 만나질지 모르지.”
“그래 계속 섭섭잖게 잘 돌봐줘.”
“응. 그래서 내가 언니보고 나중에 나도 죽어서 저승에서 다시 만나면 이번엔 내가 언니가 되서 동생이 된 언니를 잘 보살필 것이라 하니 마침내 얼굴을 펴고 웃더니 한참 있다가 고맙다면서 다시 울더라.”
“큰일인데. 우리 처형이 그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되는데 말이야.”
전화를 끊고도 한참이나 마음이 뒤숭숭했다.
이튿날 또 전화를 걸어
“처형은?”
“오늘은 밥도 잘 묵고 푹 자고 있다.”
“거게 병원이가? 현서는?”
“데불고 왔다. 스님할매 빨리 나으라고 예쁜 말을 해서 만 원짜리 한 장 얻었다. 병원에 어린아이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너무 이기적이다 싶어 속으로 삼키며
“참 큰 며느리는 왔나?”
“아니. 서울서 아들만 왔다 갔다.”
“큰일이네. 서로 풀어야할 건데.”
대기업에 다니는 장남 승만씨의 결혼문제가 대두되면서 평온하던 미혜씨의 집안에 갑자기 태풍이 몰아쳤다. 어디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들이라 미혜씨의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엄마, 내 여자가 생겼다. 곧 결혼을 해야겠다.”
어느 명절에 조심스레 말문을 열면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여주는데
“야야, 예쁘네. 그런데 이거 너무 예쁜 것 아냐?”
예소의씨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래 말이다. 여자가 못 나면 꼴값을 하고 잘 나면 인물값을 한다는데 나는 이만큼 잘난 며느리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째 좀 차가운 인상이기도 하고.”
미혜씨 역시 마뜩찮은 눈친데
“아이다. 똑똑하고 야무치고 성격도 좋다.”
“그런가?”
“그런데 말입니다.”
“와? 말을 해라. 벌써 사고라도 쳤나?”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그래 말해봐라.”
“아버님이 장애가 있어서...”
“우째? 교통사고라도 당 했나?”
“아니 선천적으로 키가 작고 등이 튀어나온 사람...”
“뭐 꼽새라고?”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싸아했다. 한참이나 지나
“안 된다. 이건 절대로 안 된다.”
미혜씨가 단언을 하자
“아버지!”
애처롭게 예소의씨를 올려다보자
“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버지는 늘 사람차별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니지. 이건 아니지. 단지 바깥사돈이 몸이 좀 불편한 거야 어떠누? 아예 없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만 이건 니 자식, 그러니까 내 손자 대에 또 그런 장애인이 나올 줄 모른단 말이다.”
“...”
“힘들겠지만 없었던 일로 하자.”
“아닙니다. 아가씨가 문현동에 사는데 내일 인사를 올 것이라 했습니다.”
“문현동이라? 내 문현동에 오래 살아도 곱새가 산다는 소리른 못 들었는데...”
“보소. 만이아버지 시방 그 기 문제요? 야야, 좌우지간 그건 안 된다.”
하고 이야기가 끝이 났는데
“엄마, 내 문현동에 인사하고 오께.”
하는 아들에게
“안 된다. 니가 부모 말 안 듣고 거게 가면 내 자식이 아니다.”
미혜씨가 완강하게 말했지만
“갔다 오께요.”
승만씨는 씩씩하게 나갔고 그 때부터 미혜씨부부는 아예 집을 비워버렸다.
그 후 서울로 돌아간 승만씨가 몇 번이나 전화로 통사정을 해도
“봐라. 부모자식 간에도 되는 일은 되고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이기 어데 내 좋을라고 하는 일이가? 니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그러니까 엄마는 그냥 받아만 주시란 말입니다. 앞으로 힘들 일이 생겨도 그건 어디 내 문제니깐.”
“아니지. 그게 우째 니 문제고 내 자손들 문제지.”
하고 잘랐고 어느 날은
“엄마, 새로운 생명을 생각해서라도 좀 용서를 하소 엄마 손자가 아닙니까?”
“내가 그래 하라고 시켰나? 괜히 장애아 낳지 말고 알아서 정리해라.”
하고 또 입술을 깨물었는데 어느 날은
“엄마는 그렇게 모진 죄를 짓고 우째 살랍니까? 입장을 바꿔서 한번 생각을 해보소.”
“시끄럽다. 니가 내 입장이라면 니는 그 기 쉬울 것 같나?”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그 날 이후 통 소식이 없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회사로 연락을 했더니 영국지사로 자원을 해서 런던으로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는데 어느 해 추석전날
“엄마, 저 왔습니더.”
2층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소리가 소란하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다. 인사해라.”
세살 쯤 되는 사내아이를 앞세우고 올라오는 아들 뒤로 딸인 듯 머리에 리본을 단 갓난애를 안은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고 파리하도록 흰 피부의 조각상 같은 여자 하나가 고개만 까딱 인사를 했다. 하는 수 없이 결혼을 시켰지만 미혜씨와 예소의씨 부부가 특별히 할 말이 아니면 말을 않는 것보다도 더 과묵하게 며느리가 아예 말을 붙일 생각을 안 했다.
보다 못한 예소의씨가 며느리에게 말도 붙이고 선물도 사주고 마음을 열어보려고 해도 겨우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얼굴 한번 펴지 못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얼음장 같은 싸늘한 표정의 미인이라는 말도 다 맞는 것 같았다. 명절이 되어도 무슨 핑계를 대면서 시집의 제사음식에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당일아침에 와서 밥만 먹고 일어나며 음식을 사줘도 들고 갈 생각을 않았다. 그 숨 막힌 세월이 벌써 10년도 넘은 것이었다.
“우짤 수가 있나? 중간에 든 두 남자가 풀어야지.”
하고 말은 해보지만 그 과묵한 부자가 과연 그 두꺼운 빙벽을 녹여낼지는 의문이었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