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 강당에서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가 부산지역 유치원·어린이집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의하고 있다. [사진 = 조송현]
2019 개정 누리과정이 내건 ‘유아·놀이·자연 중심’ 철학이, 최근 교육부·전국시도교육청과 이화여자대학교 교육연수원이 추진 중인 '교육과정 실행' 분야 전문강사 연수로 인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현장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교원 4대 분야 역량 강화 연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이의 제1분야인 ‘교육과정 실행’은 강의와 컨설팅을 담당할 전문강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 '교육과정 실행'이 잘못 진행된다면 2019 개정 누리과정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생태유아교육학자이자 운동가인 임재택 부산대 명예교수는 21일 부산진구 양정동 부산시민운동지원센터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부산주주·독자클럽 11월 정기 인문학 강좌에서 “이재명 정부는 50년 만에 어렵게 이룬 유아교육과정 개혁을 퇴행적인 내용의 전문강사 연수로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2019 개정 누리과정, 50년 만에 되찾은 자연·놀이·아이 중심 철학"
임 교수는 먼저 2019 개정 누리과정의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누리과정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5세 모든 유아를 위한 국가수준 공통 교육과정이다. 2019 개정안은 ‘성격’과 ‘추구하는 인간상’을 새로 명시하며, 유아의 전인적 발달을 돕는 자연 중심·놀이 중심·아이 중심 교육과정을 표방했다.
교사 주도 활동을 지양하고, 유아가 충분한 놀이 경험을 통해 자율성과 창의성을 키우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감수성과 더불어 사는 시민성을 기르는 것이 핵심 방향이다. 내용도 최소화해, 교과식 지식 전달이 아니라 “유아가 일상에서 스스로 놀며 배우는 과정”을 교육과정의 중심으로 삼았다. 임 교수는 이를 “유아를 입시와 조기 교육의 대상으로만 보던 50년을 넘어서, 마침내 아이의 삶과 행복을 교육과정의 중심에 되돌려 세운 개혁”으로 평가했다.
"'교육과정 실행' 분야 전문강사 연수, 개혁 취지 정면으로 거스른다"
그러나 최근 추진 중인 ‘교육과정 실행’ 분야 전문강사 연수는 이런 개혁의 정신을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임 교수는 “연수의 언어는 여전히 ‘성과, 관리, 효율, 평가’ 중심인데, 이는 자연·놀이·아이 중심의 누리과정을 다시 서류와 지표 중심 교육으로 후퇴시키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놀이를 통해 배우는 아이를 돕는 연수가 아니라, 놀이를 관리하고 ‘자료화’하는 기술을 길러주는 식의 연수라면, 교사는 또다시 행정과 지침의 수행자로 밀려난다”며 “아이와 놀이를 곁에서 섬기는 교사, 생태적 감수성을 키우는 교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놀이를 숫자로 증명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순간 개혁은 멈춘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정부가 현재 진행되는 교육과정 실행의 문제점을 파악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임 교수. [사진 = 조송현]
임 교수는 한국생태유아교육연구소의 현장 조사를 열거하며 '교육과정 실행' 분야 전문강사 연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 현장 우려 ① 놀이·아이 중심이 다시 ‘지침·성과 중심’으로 현장 교사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것은, 문서 속 ‘놀이 중심’이 다시 ‘지침·성과 중심’으로 바뀌는 구조다. 2019 개정 누리과정은 연령별 세부 내용을 줄이고, 교사가 유아의 삶과 맥락에 맞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평가·기록·연수 이수 실적이 다시 강조되면, 교사는 놀이를 지원하기보다 놀이를 설명하고 증명하는 서류 작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임 교수는 “아이와 충분히 눈 맞추고, 흙을 밟고, 바람을 느끼게 해야 할 시간이 관찰기록 작성, 연수 과제 제출, 성과 보고에 소모되고 있다”며 “이런 흐름이 계속되면 누리과정이 선언한 ‘유아 중심’은 말뿐인 구호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 현장 우려 ② 생태·자연 중심 가치의 주변화 2019 개정 누리과정은 자연 속 놀이와 생태적 감수성을 중요한 가치로 담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 인공지능, 코딩 교육 등 새로운 의제가 부각되면서, 현장에서는 다시 실내 활동과 스크린 중심 활동이 늘어나는 분위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임 교수는 “생태유아교육은 단지 숲 체험 한 번 다녀오는 차원이 아니라, 아이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몸으로 깨닫게 하는 삶의 방식”이라며 “지금처럼 AI와 디지털 역량 담론이 강화되는 분위기에서, 자연·생태는 ‘시간이 남으면 하는 부가 활동’으로 밀려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사회 준비와 AI 교육을 이야기할수록, 오히려 더 단단한 생태유아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현장 우려 ③ 교사 전문성과 자율성 축소 2019 개정 누리과정은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존중한다”는 방향을 담고 있다. 교사는 교과서를 따라가거나 시간표대로 ‘진도’를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유아의 삶과 맥락을 읽고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전문가’로 설정돼 있다.
하지만 최근 연수·평가 정책은 교사를 다시 ‘표준화된 역량 모델’과 ‘하향식 가이드라인’의 대상로 만드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걱정이 크다. 임 교수는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놀이 중심이 ‘모호하다’는 불안과, 행정이 요구하는 수많은 증빙”이라며 “이 불안을 줄여줘야 할 연수가, 오히려 또 다른 통제 도구가 되면 현장은 다시 ‘정답 찾기 교육’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 현장 우려 ④ 유치원·어린이집 간 격차, 누리과정의 불평등한 실행 누리과정은 ‘공통 교육과정’이지만, 실제 구현 수준은 기관 유형과 재정 여건에 따라 크게 다르다. 국공립과 사립, 법인과 민간, 유치원과 어린이집 사이의 구조적 격차는 여전히 크다.
임 교수는 “놀이·아이 중심 교육과정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시간, 공간, 인력, 재정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공공성 강화 없이 교원 연수만 강조하면, 결국 형식만 남기고 내용은 약한 곳부터 무너진다”며 “이 상태에서는 ‘모든 유아에게 동등한 질의 교육’을 약속한 누리과정의 정신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강의를 마친 뒤 임 교수와 참석자들의 기념 촬영. [사진=정동섭]
"이재명 정부, 방향을 분명히 해야”
임재택 교수의 강연은 단순한 정책 비판을 넘어, 유아교육을 “정권의 성과사업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위한 사회적 기반시설”로 바라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그는 “유아기의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정부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 피해는 통계가 아니라 아이 개개인의 삶에 남는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재명 정부에 △2019 개정 누리과정의 철학(유아·놀이·자연 중심)을 어떠한 행정·연수·평가에서도 훼손하지 말 것 △교원 연수를 ‘통제·관리’가 아니라 ‘전문성·자율성 강화’에 두도록 전면 재설계할 것 △생태유아교육과 지역·자연과 연결된 유아교육 실천을 국가 의제로 격상할 것을 제안했다.
강연장을 찾은 시민과 교사들은 “유아교육은 미래세대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투자”라며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50년 만에 어렵게 쌓은 개혁의 성과를 지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이재명 정부가 진정으로 미래를 말하려면, 초·중고의 입시나 AI 교육보다 더 먼저, 유아기의 놀이와 생태적 삶을 지켜줄 약속부터 확인시켜야 한다”는 임 교수의 말에 뜨거운 박수로 호응했다.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