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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저쪽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시간 낼 수 있나?” 점심을 막 물린 뒤였다. 그렇다고 하니, 바로 비닐하우스로 내려와 달란다. 친구는 부추와 취나물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내년 1월 말부터 취나물을 수확한다. 그 준비에 한창 바쁠 때임은 익히 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빠도 친구는 나를 일꾼으로 보지는 않는다. 노동 강도에 맞먹을 근력이 부족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직종(농사)과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가 내 일손을 빌리려고 하는 것은 꽤나 절박한 일이 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부리나케 자전거로 20여 분 걸려 비닐하우스로 갔다. 비닐하우스 안 속비닐을 씌우려는 참이었다. 세 사람이 필요한 일이다. 좌우에서 당기고 가운데서 조정을 해줘야 한다.

약속한 일꾼이 못 나올 일이 생겼든지, 일을 진행하다가 일에 순서가 바뀌게 되었든지 간에 일손 하나가 부족하게 된 것이리라. 외국인 노동자를 부를 수도 없다. 그들은 한나절 일은 안 한다. 설령 한다 하더라도 한나절 일 시키고 하루 품삯을 줘야 한다. 하여 이런 저런 고심 끝에 친구는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리라.

취나물 비닐하우스는 6동이다. 3시간이 못 돼 일을 마쳤다. 친구가 고맙다며 하루 일당을 건넨다. 이로 봐서는 친구가 외국인 노동자 한나절 쓰고 하루 일당 주느니, 차라리 친구나 돕자, 는 심산으로 나를 부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받는 일당에서 반을 떼 돌려 줬다. “세 시간 일하고 하루 일당을 받으면 도둑놈이지.”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기회비용! 일 3시간, 갔다 왔다 1시간, 씻기 등 1시간, 총 5시간. 품삯 5만 원. 이 5시간 동안 포기된 이익, 곧 읽기나 쓰기의 값이 5만 원이 되는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포기한 최선의 대안의 가치이다. 곧, 비닐하우스 일로 인해 5시간 동안 포기한 것은 ‘읽고 쓰기’이다. 그런데 그 읽고 쓰기가 지금 이 당장에는 금전적 수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하여 포기한 금전적 가치는 0에 가깝다. 따라서 이번의 선택(비닐하우스 일)은 기회비용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기회비용을 금전적 가치만으로 따질 수 없는 일이다. 비금전적 가치, 곧 자기표현이나 자기 확인, 해혹(解惑)에 따른 정신적 자유, 앎의 기쁨, 그리고 장기적 가능성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예를 들어 쓴 글이 모여 책을 낼 수도 있고, 내 삶을 확인하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활동이다. 그러니 기회비용이 현재는 0에 가까우나, 적어도 내 자신에게는 잠재적으로 5만 원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경제적 가치가 항상 최우선 가치라는 사실이다. 현대가 물질만능주의니 어쩌니 하지만, 역사 이래 인간은 늘 그랬다. 더구나 원숭이뿐 아니라 인간 역시 ‘조삼모사’(朝三暮四)하다. 경제적 가치에다 ‘현재적 가치’를 중시한다. 미래의 가치, 이걸 인정한다든지 이것에 삶을 거는 사람을 시답잖게 여긴다.

하여 ‘돈이 되는 일’만을 일로 쳐주고, 돈이 안 되는 읽기나 쓰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읽고 쓰는 일이 근력 노동만큼 힘들고, 그 이상으로 진을 빼는 작업이다. 그래도 돈과 직접적 연결이 되지 않으면, 한가한 게으름뱅이 의 취미 정도로 치부한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 그 기본 원리는 ‘생존’과 ‘번식’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생존 자원(먹을 것, 의료, 주거 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적 지위도 낮아져 배우자를 얻거나 번식 기회를 갖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경제적 성공→생존과 번식에 유리”라는 구조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왜 현실에서 존재할까? 나아가 미래 세대에서도 나타날까? 진화론적으로 보면, 경제적 곤궁 속에서 번식 기회가 줄어들면, 그 특성을 가진 집단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하여 인류의 장구한 역정 속에서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과거에 이미 씨가 말랐어야 했다. 한데 왜 절멸하지 않을까?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5)는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직을 제안 받았다. 당시 그는 이미 『윤리학(Ethica)』을 집필 중이었고, 유럽 지성계에서 주목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유는 “공적 강의에 나서지 않고서야, 어느 정도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능력이 부족해서 돈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대학 교수직을 제안 받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안정된 지위와 수입보다는 정신적 자유와 고요한 삶을 더 높은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곧, 교수의 지위와 수입에서 얻는 이익이나 가치(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가 100이고, 정신적 자유와 고요한 삶의 이익이나 가치(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는 200이라면, 누구나 스피노자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는가?

물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분명 대가가 따른다. 스피노자는 생계를 위해 렌즈 연마(lens grinding) 일을 했다. 당시 렌즈 연마 과정에서는 유리와 석영 가루가 공기 중에 떠다녔고, 이를 장기간 흡입하여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결국 폐결핵으로 이어져 향년 43세로 졸했다.

돈 되는 일만 일로 치는 사람들에게는 어쩜 스피노자의 일생은 자신들의 인생관이 옳음을 예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생존 가치’와 ‘존재 가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계속>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