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인간에게 단순한 이동 경로나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길은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부터 우리의 사유와 존재를 시험하는 장이 된다. 길 위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배우며, 시간을 읽는다. 나에게 길은 언제나 삶의 화두였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 자신과 마주했고, 세상과 연결되었으며, 끝없는 질문 속에서 삶을 탐구했다.
어린 시절, 나는 집 앞 좁은 골목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곤 했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발끝에 닿는 돌멩이와 흙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모두 길이 주는 작은 선물이었다. 그 길에서 나는 세상을 처음 만났고,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긴장과 호기심을 배웠다. 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경험과 상상을 열어주는 통로였다. 어린 시절 길 위에서 느낀 자유와 설렘은 삶의 기초가 되었고, 나를 길 위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20대 초반, 나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리피하고 저리 피하고 우역곡절 끝에 30대 초반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목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고, 이후 35년 동안 나는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길 위에서 나는 단순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명을 따라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돌보았다. 교회당의 문을 열고 닫는 순간부터, 설교와 상담, 위로와 격려까지, 모든 순간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목회라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람들의 삶과 사건들은 끊임없이 나를 시험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신앙의 빛을 발견하고자 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신앙과 사명을 실천하며 세상과 만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은 결국 우리의 삶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된다.
나는 지난 2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10킬로미터 이상을 걸어왔다. 걷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몸이 되었고, 걷기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 길 위에서는 고민도 문제도 단순해진다. 발걸음이 이어지는 한, 마음속 잡념은 자연스레 사라지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 남는다. 길 위의 시간은 정직하다. 속일 수 없고, 돌아갈 수도 없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길모퉁이에서 마주친 노인의 한마디, 먼 길을 함께 걸은 친구와 나눈 침묵, 낯선 도시에서 길을 묻고 들었던 친절한 목소리 모두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길 위에서는 고립되지 않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되며,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길은 혼자 걷는 길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얽히고설키는 길이었다.
길 위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 걸었던 골목길, 젊은 시절 내딛던 도로, 중년이 되어 걷는 산길은 모두 시간의 층위를 담고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때, 나는 지나온 길 속 후회와 아쉬움을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그리며 희망과 결심을 다진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시간을 담고, 흔적 하나하나가 삶을 기록한다.
때로 길 위에서는 홀로 걷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 없는 어두운 길, 비가 내리는 외로운 길, 예상치 못한 장애물과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피하지 않았다. 고독한 시간은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삶의 본질을 깨닫게 만든다. 외로움과 침묵은 단순한 공허가 아니라, 내 삶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였다. 길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한다.
길 위에서 우리는 선택과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어떤 길을 걸을지, 어느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하는 순간마다 삶의 주체가 된다. 작은 선택 하나가 인생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수없이 경험했다. 선택 없는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택 없는 삶 또한 없다. 길 위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걷는 동안 나는 인간과 자연, 사회와 역사,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했다. 길은 질문을 던지고, 나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장이었다.
길 위에서 나는 삶의 의미를 묻고, 나 자신의 존재를 묻고, 세상을 묻는다.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을 깊이 사유하는 훈련장이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나를 단련하고, 생각의 폭을 넓혔으며, 내면의 균형을 찾았다. 길 위의 사유는 책이나 강의에서 배울 수 없는 체험이었다.
5년 전, 나는 은퇴했다. 목회 현장을 떠나면서 많은 것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발걸음, 수많은 만남, 수많은 기도와 설교는 모두 내 삶의 흔적이 되었고, 그 속에서 하느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발걸음이 느려졌지만, 길 위에서 사유하고 기도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더욱 깊어졌다. 길은 여전히 삶의 성찰과 신앙적 깨달음을 동시에 제공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어둡고 험한 길이라도, 끝에는 새로운 풍경이 있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이 미래의 가능성을 막을 수 없으며, 우리는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나는 길을 통해 희망을 배웠고, 멈추지 않으며 나 자신을 믿는 법을 배웠다. 길은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를 보여준다.
길 위에서 나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동시에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느낀다. 길은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며, 세상과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경험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과 존재의 근본적 질문과 만나는 통로였다. 나는 길을 걷는 동안 삶을 배우고, 인간을 이해하며, 존재를 사유했다.
삶의 화두로서 길은 나에게 끝없는 성찰과 배움, 깨달음을 주었다. 발걸음을 옮기는 매 순간, 나는 나 자신과 세상을 만났고, 시간을 배우며, 사람을 이해하고,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다. 앞으로도 나는 길 위에서 삶을 묻고, 나 자신을 발견하며, 세상과 연결될 것이다. 길은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내 삶 전체를 꿰뚫는 중심이자 화두다. 오늘도, 내일도, 그 길 위에서 나는 나를 붙든다.
길은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길 위에서 답한다.
“나는 나의 길을 걷고 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나의 삶이며, 호흡 하나하나가 나의 사유이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살아있음을, 존재함을, 그리고 나 자신임을 확인한다. 길은 나의 스승이자 친구이며, 삶 전체를 꿰뚫는 화두이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오늘도 나를 붙든다.
◇ 박철 : 감리교 은퇴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시인. 생명과 영성, 사회적 실천을 주제로 글을 써왔다. 매일 자작시 한편을 지인들과 나누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어느 자유인의 고백』,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낙제 목사의 느릿느릿 세상 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