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뿌리 깊은 문화력으로 단단한 통합의 길을 열어가야
김영춘 / 편집주간
오래전 몽골 초원의 사막화 지역 조림 현장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한국과 다른 방법으로 어린나무를 심습니다. 땅을 50cm 이상 깊이 파서 묘목을 심고서는 우리처럼 흙을 다 덮지 않고 20~30cm 구덩이를 남겨둡니다. 왜 그럴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지 않으니, 인공적으로 물을 줄 때나 비가 내릴 때 묘목 쪽으로 물을 모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묘목은 몇 년이 지나도 키가 거의 자라지 않습니다. 성급한 한국인들이 죽었나 하고 뽑아보면 뿌리가 성큼 자라 있습니다. 그렇게 한 3년 지나서야 나무는 비로소 키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웬만큼 자란 뿌리로 적은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겠다 싶을 때에야 줄기를 키우고 잎을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지정학적 환경도 몽골 사막지대만큼이나 척박합니다.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외침(外侵)을 당해온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금 독립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최근 경제적 성공과 정치발전 그리고 문화적 성취가 어우러져 우리의 국가 브랜드가 한 단계 높아졌다고들 합니다. 이에 자부심을 느끼는 데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자존망대(自尊忘大)의 국뽕 트렌드마저 생겨난 실정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처지가 그렇게 단단한 초석 위에 서 있을까요? 미국이나 중국의 경제 제재에 맞설 만큼 튼튼하고 규모 있는 내수경제를 갖고 있지도 못하고 경제의 혈맥인 자원과 식량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합니다. 국방력도 북한은 몰라도 우리 주위의 세계 최강대국들에 맞설 정도는 못 됩니다. 최근에는 그 초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이 벌어져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의 척박한 환경을 이겨나가는 힘은 무엇일까요? 경제력, 국방력은 기본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힘은 문화력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에 뒤지지 않고 오히려 더 우월한 문화적 성취를 일부 엘리트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공유하는 문화 대국의 길이 가장 중요한 국력입니다. 그 힘은 우리나라가 어떤 어려운 도전과 공격에도 싸워 이길 수 있는 강인한 국가 정신을 키워내는 사막 식물의 뿌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공유되는 사회적 문화력이 있어야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내는 통합의 원천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그런 강력한 문화력이 있는가요?
불법 계엄을 극복하고 정상 국가로 돌아오기까지 보여줬던 우리 국민의 힘은 분명 그런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여과 없이 노출된, 터무니없이 과격한 주장들에 이끌린 극단적 진영 대립은 우리의 문화력, 문명력이 갖는 허약한 토대를 증명하기도 합니다. 또 하나 우리 사회의 문화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은 많은 국민들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배금주의, 타인과의 비교, 체면치레 등의 반문명적 잣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행복관,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살더라도 그다지 불행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인문학이나 문화예술이 해야 할 일이 사람들에게 이런 시선을,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일입니다.
문화력이 높은 사회는 건강한 상식에 기초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런 개인들의 상식이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지점이 시대정신이고 그 사회의 보편적 규범이 됩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취약점은 그런 자유로운 개인들이 소수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상론은 다음 기회로 미루되 다만 치유책은 분명합니다. 유행이나 타인의 시선에서 독립적인 개성들을 창출하는 문화의 고양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본세상》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우리는 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사회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국민소득이나 대졸자 비율, 첨단무기의 확보, AI기술 수준 따위를 뛰어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힘이 될 것입니다.
이번 겨울호도 우리와 같은 시선으로 작업에 참여해 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새해 더욱 평안하시라고 인사 올립니다~^^.
<편집주간 / 전 해양수산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