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지난 3년여 황량한 세월을 거친 입으로 견뎌낸 성싶다. ‘생겨먹은 데’(천성)가 진중하지 못하고 좀 가볍다. 그러니 자연 목소리 톤은 높고, 내뱉는 단어는 투박하고 좀 상스럽다. ‘세상과의 부조화’라는 인지부조화를 직설적 감정 토로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해소하려 했던 듯하다.

‘복잡하다’는 단어를 잘 구사하는 친구가 있다.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리면, 일이 복잡해진다’, ‘아무 여자에게나 들이대면, 일이 복잡해진다’, ‘나이 들어 주머니가 가벼우면 , 일이 복잡해진다’, ‘하체 근육이 부실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따위로 말한다.

지난여름 어느 날 그 친구한테서 술 한 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하동읍의 장어집이란다. 예의 그 ‘우리 나이에 안주를 잘 챙겨먹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문득 ‘아하’하고 마음속으로 무릎을 쳤다. 일종의 ‘아하 체험!’(aha experience!)이었다.

주간 <하동신문>의 6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는, 「흔들리지 않는 하동 표심 “국힘 텃밭 재확인"」이다. 하동에서 이재명 후보 36.2%(10,904), 김문수 후보 56.6%(17,035), 이준석 후보 5.0%(1,492)를 득표했다. 지난 대선과 비교해 이재명 후보는 0.76% 상승에 그쳤다. 이는 지난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 제윤경 후보가 얻은 37.25%보다 1.05% 낮은 득표율이다. 반면 김문수 후보의 득표율은 지난 총선에서 국힘의 서천호가 얻은 55.60%보다 1% 더 상승했다.

인생관은 각자 다르고, 또 다름이 바람직스럽다. 정치관도 그리하리라. 마는 인생관은 개인적이지만, 정치관은 공동체적이다. 개인적 시각을 뛰어넘는 공동체적 시각은 학습을 요구한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본능적이지만, 본능적 행위만으로는 공동체를 구성하거나 운영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학습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을! 정치심리학자들은 ‘정치는 본능이다’고 주장하고, ‘진보의 뇌와 보수의 뇌’가 태생적으로 구별된다고 하니, 뭘 더 거론하랴! 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기로 한다.

삼독(三毒)! 불교에서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인 탐욕, 진에(嗔恚), 우치(愚癡)를 독에 비유한 말이다. 줄여서 탐진치(貪嗔癡)라고 한다. 나는 특히 진에에 관심한다. 성내는 일이다. 의분(義奮), 곧 불의를 보고 일으키는 분노를 높이 치는 까닭에 진에란 독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성냄의 강도가 크건 적건 진에에 해당하므로, 시기와 질투, 혐오, 증오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물론 이 정도는 나 같은 범부(凡夫)의 도덕의식으로도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내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에 화를 냄’도 전형적인 진에의 한 양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에는 자기중심적인 기준이나 고정관념에 어긋날 때 생기는 거부반응이다. 진에의 무서운 점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굳어지는 분별심과 ‘나’라는 견고한 자아의식을 키운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화를 내는 순간, ‘내가 옳다’, ‘나는 공격 받았다’는 전제를 이미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분별심(分別心)과 분별력(分別力)은 다르다. 분별심은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 판단하는 마음’이다. 나쁠 게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경계하는 바는, 판단의 기준이 ‘나’와 ‘내 생각’과 ‘내 이익’이기가 십상이므로, 내 중심으로 편견과 아집에 빠져 남을 차별할까 저어하는 것이다.

분별심은 ‘세상물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을 듣고 분별심이 아니라, 분별력으로 바른 판단을 했더라고 왜 성을 내야 하는가? 상대방의 주장에 분별력으로 봐서 화가 나더라도, ‘이 화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일어난 감정인가?’하고 내 자신에게 한 번 더 자문하면서 경계한다.

친구의 ‘복잡하다’는 말에 무릎은 친 순간, 시 한 구절이 더 떠올렸다. 그래, 수구꼴통들의 억지주장과 대면해도, 성은 내지 말자. 대신에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하고 읊으면 될 일이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꽃’에 ‘민주주의’를 바꿔 넣어도 적실하게 맞아떨어진다.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