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 소프트사의 AI 'copilot(GPT-5)'을 부려 만든 그림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의자/조병화(1921~2003)-
나는 전형적인 아날로그 세대의 일원이다. 휴대폰도 통화와 카톡 등 몇 가지 기능만 이용한다. 신기술에 필요를 별로 느끼는 못하는 정적(靜的)인 생활을 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적응을 못해 그냥 무시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미련퉁이인지, 아니면 이 둘 다여서 그럴 것이다.
어쩌다가 진주에라도 나가면 약속 시간 대기가 큰일이 된다. 택시 예약 앱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택시 잡기가 참 고역이다. 이젠 농사일도 기계화된 지 오래다. 지인의 일을 도우려 가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 쓰는 일, 근력 사용하는 일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만 맡게 된다.
시대에 뒤진 사람인가? 그런 것만은 아닌 것도 같다. 누구보다도 컴퓨터를 더 많이 사용하고, 온라인으로 외국 정기간행물을 읽는다. 영문도 워드로 친다. 더구나 요즘은 거의 매일 챗GPT와 대화는 물론 논쟁도 한다.
왜 이런 불균형이 발생했을까? 각자의 직분이 있고, 그 직분의 필요에 따른 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역시 필요는 학습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중국의 장강(長江)뿐 아니라 어느 강(江)에서든, 하동의 섬진강에서도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게 되어 있다. 세상이란 단어의 뜻 안에는 ‘변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변화란 세상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그 변화한 세상의 주인공은 새 세대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 이형기 시인은 <낙화落花에서 노래했다. 맞다. 그러나 떠나는 때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순간이다. 떠나는 순간의 아름다운 뒷모습, 그 다음은? 뒷방 늙은이가 된다면 순간의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꽃이 떨어짐(낙화)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삶의 완전성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니,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 어쩜 삶의 매듭에서 가장 ‘빛나는 세월’일 수도 있다. 하여 이 소중한 세월을 세상과 함께 호흡하며 세상의 변화에 걸음을 맞출 필요가 있다.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깨달음이다.
변화는 세상의 속성이지만, 그 변화를 이해하고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거나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그 변화에 맞추기란 참 벅찬 일이다. 20여 년 전인 2001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우리가 아는 세상의 종언』(창작과비평사/2001)을 깊게 읽었다.
월러스틴은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근대 자본주의 세계체계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동시에 그 체계를 설명해온 사회과학 역시 유효성을 잃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앞으로 25~50년 동안 세계는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제도와 가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논리적 근거는 대기에는 궁리를 무던히도 해야 하지만, 이 정도의 전망은 직관적으로 감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2025년 현재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기존의 제도와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월러스틴의 전망대로인가? 아니다. 그 근거가 월러스틴의 예상 밖이다.
월러스틴의 전망은 주로 경제적·정치적 구조의 균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체계의 한계와 사회과학의 위기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기술 혁신이 불러올 급격한 변화, 특히 AI와 같은 지능적 기계의 등장은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그의 ‘종언’은 체제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는 유효했지만,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오늘의 현실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AI 시대는 월러스틴조차도 예측하지 못했을 만큼 거대한 변화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미지를 만들며, 지식을 재구성하는 이 새로운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자본주의 체계의 위기라는 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과 노동, 지식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는 전환기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았다, 이데올로기의 이해나 사회과학의 틀만으로는 더 이상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세상 변혁의 힘은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평생을 세상과 그 변화의 이해에 바쳐왔는데, 이제 AI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우울한 며칠을 보내다가 작심을 했다. 어쩜 평생을 길이 나있지 않은 덤불을 길 내며 걸었다. 한 번 더 부닥쳐 보자. AI란 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직접 부닥쳐 봐야 알 수 있다. 어쨌건 사람이 만든 것이지 않은가. 막연한 두려움을 갖거나 거리감을 두고서는 아무 일도 해결할 수 없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