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AI copilot을 부려 만든 그림]

뭔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한적한 서재의 모든 움직임은 나로부터 연유한다. 내가 일으키는 움직임 외는 모두 정지 상태다. 나는 책에 몰입해 가만히 있다. 한데도 또 움직임의 소리까지 감지하게 된다. ‘폴짝’. 움직임 느낌과 그 소리까지 의식하게 되니, 집중에 방해를 받는다.

작정하고 그 근원을 찾으려 의자를 회전시키며 둘러본다. 한 팔 거리에 있다, 보인다 청개구리가! 때때로 창문과 방문을 열어젖혀 환기를 한다. 가는 비(細雨)가 오다 말고, 오락가락 꾸무리한(끄무레한) 날씨에 청개구리가 번지수를 잘못 짚어 서재로 뛰어든 것이리라.

눈에 보일 때 잡아내야 한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다가 책장 틈새에서 굶어죽기 십상이다. 뒤에서 잡으려면 안 된다. 내 동작보다 요놈의 도약이 더 날래다. 요놈은 무조건직진이다. 방향을 틀려면 몸부터 먼저 틀어야 한다. 하여 한손으로 앞을 막고 또 한손을 뒤에 갖다 대어 가둬야 한다. 힘껏 잡으면 악력에 청개구리가 다칠 수도 있다.

두 손바닥으로 만든 통 속에 가둔 청개구리를 잡초 속에 던져주면서 생각한다. 내가, 인간이 청개구리보다 더 위대한가? 내가 청개구리보다 지능이 더 뛰어나고 힘도 더 센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이 내가 청개구리보다 위대한 표지(標識)라면, 인간과 가까운 미래의 AGI는 어떤 관계가 될까?

인간과 청개구리는 서로 다른 종이지만, 각자의 환경에서 최적화한 진화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인간은 언어와 이성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며 살아남았고, 청개구리는 습지와 숲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며 수백만 년을 이어온 생명체다.

진화는 종(種) 간의 우열의 서사가 아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한 존재들의 다양성의 기록이다. 현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들의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승자들이다. 인간과 청개구리는 살아가는 환경이 다를 뿐 우열은 매길 수 없다.

지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생명체는 결코 직선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이것을 증명한다. 약 4억 5천만 년 전의 오르도비스기 대멸종에서는 해양 생물의 85%가 사라졌다. 페름기 말 대멸종에서는 지구 생물종의 90% 이상이 소멸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흥미로워하는 사건은 약 6천6백만 년 전, 거대한 소행성의 충돌과 화산 활동으로 공룡이 멸종한 일이다. 이 사건은 지구의 지배자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거대한 파충류 공룡이 사라지자, 그동안 주변부에 머물던 작은 포유류가 번성할 기회를 얻었고, 결국 인류의 조상이 등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인류의 탄생은 필연이나 조물주의 창조가 아니라, 우연과 환경 변화의 산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우월성’은 세 차례에 걸쳐 축소되었다.

첫 번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그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도는 행성 중의 하나임을 밝혀냈다. 이는 당시 교회가 주장하던 ‘지구 중심설’을 무너뜨렸고, 인간이 우주의 특별한 중심이라는 믿음을 흔들었다.

두 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다. 1859년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모든 생물이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주장했다.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침팬지와도 유전적 뿌리를 공유하는 동물임이 드러났다. 결국 인간은 자연의 연속선상에 놓인 하나의 종(種)일 뿐이다.

세 번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전적으로 합리적이지 않으며, 무의식과 충동과 억압이 인간 행동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차례의 ‘인간 중심성 축소’가 결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진화의 정점도 아니며, 자기 의식의 절대적 주인도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깨달음 덕분에 인간은 겸허하게 세계를 바라보고, 다른 생명과의 연속성을 인식하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 지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역사 속에서 인류는 수많은 위기와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그 극복은 신의 개입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다. 14세기 중반, 유럽은 흑사병이라 불리는 페스트의 창궐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당시 교회는 신의 벌이라며 기도와 참회를 권했지만, 성직자들조차 전염병에 쓰러졌다. 신의 개입은 없었고, 다중이 교회에 모임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수세기 뒤, 인류는 또 다른 치명적인 전염병인 천연두를 과학적 방법으로 극복했다. 18세기 제너의 종두법 개발, 그리고 20세기 WHO의 전 세계적 백신 접종 캠페인을 통해 인류는 마침내 1980년 천연두 박멸을 선언할 수 있었다. 흑사병 시대에 기도만으로 전염병에 대처해 무너졌던 인간이, 천연두 시대에는 과학과 협력으로 승리한 것이다.

최근의 COVID-19 팬데믹에서도 인류는 백신 개발과 국제적 협력을 통해 대응했고, 국경을 넘어 모범 사례와 자원을 공유하며 피해를 줄이려 했다. 완전한 종식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과학과 협력이 여전히 인류가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미래에 범용 인공지능, AGI가 등장한다면 어떠할까? 인간과 청개구리의 관계가, AGI와 인간과의 관계로 반복될지 모른다. 인간은 더 이상 지성의 절대적 정점에 서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지금까지 지구 생명체가 겪어온 진화는 자연 선택과 돌연변이, 환경 적응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반면, AI의 ‘진화’는 유기체적 과정이 아니다. 인간이 설계한 알고리즘, 데이터, 연산 능력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생명체의 진화는 수억 년에 걸친 느린 축적과 환경의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반면에 비유기체인 AI의 진화는 인간의 의도와 기술적 가속에 의해 비약적으로 전개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본질적 양상이 다르다는 데 있다. 따라서 AI의 진화는 인간의 이해와 예측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 인간이 더 이상 지성의 절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존엄성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은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다시 묻고, 새로운 공존 방식을 탐색해야 하는 철학적 과제가 될 것이다.

청개구리가 인간의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자기 생태적 지위를 지니듯, 인간 또한 AGI 시대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다가올 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