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이 이곳에서 숨을 거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에 있는 '삿갓 문학동산' 입구. 사진= 조해훈
좋은 고을 길주라 하나 조금도 좋은 고을이 아니어서(吉州吉州不吉州·길주길주불길주)
허가가 많이 사나 과객을 허하는 집 하나도 없네.(許可許可不許可·허가호가불허가)
맑은 강 명천이란 지방에 사람은 전혀 맑지 못해서(明川明川人不明·명천명천인불명)
고기밭 어촌에 고기란 꼬리도 볼 수 없네.(漁佃漁佃食無魚·어전어전식무어)
위 시는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1807~1863)의 「길주·명천에서」(吉州明川·길주명천)로, 『김삿갓 풍자시 전집』(이응수 엮음, 실천문학사, 2000)에 수록돼 있다. 그는 늘 삿갓을 쓰고 다닌다고 하여 김삿갓 또는 김립(金立)으로 불렸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함경도 길주와 명천에 갔을 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시의 내용은 어렵지 않아 금방 이해가 된다. 그는 한시를 갖고 논다. 한자를 떡 주무르듯이 해 시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그의 풍자시를 한글로 독음해 읽으면 욕설이 많이 섞여 있다.
'삿갓 문학동산'에 세워져 있는 김삿갓 동상 앞에서 필자가 셀카로 촬영했다.
필자는 지난 10월 31일 김삿갓이 숨을 거뒀다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에 다녀왔다. 그런 연유로 김삿갓의 시 중에 위 시를 소개하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김익순(金益順)이 무인 벼슬을 살고 있을 당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함으로써 김삿갓의 곡절 많은 삶이 전개되었다. 이후 조정에 의해 김익순은 참형되고, 가족들은 목숨은 건졌으나 출세 길이 막혀버렸다. 김삿갓의 방랑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는 앞날에 다른 방도가 없어 세상을 떠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금강산을 거쳐 우리나라 최북단인 함경도 길주와 명천은 물론 제주도까지 방랑하였다. 그가 금강산에 들어가면서 쓴 시 「入金剛·입금강」과 「금강산에서」(金剛山·금강산)도 있다.
'삿갓 문학동산 '에 있는 김삿갓 시비들. 문학동산에만 60기가량 세워져 있다. 사진= 조해훈
현재 그가 남긴 시편은 300수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시(詩)라고 발굴되는 작품 중에서 ‘과연 김삿갓의 시일까?’라는 의심을 받는 것들도 있다. 김삿갓의 시라고 구전되어 오는 시들 중에서도 완성도가 떨어져 한 수의 시로 정확하게 구성이 되지 않는 것들도 제법 있다.
여하튼 김삿갓은 한시를 잘 지어서 위기를 모면하고, 어려운 민중을 도와주고, 못된 사람을 혼내주기도 한 모양이다. 김삿갓 한시의 중심은 세상에 대한 풍자와 놀림이다. 그래서 육담(肉談)을 섞어서 조롱한 예가 많다.
김삿갓에 대한 설화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만 38편이 채록될 정도로 그 양이 많다. 그 가운데 「서생들의 이를 뺀 중을 혼내다」라는 설화가 있다.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김삿갓이 금강산으로 가다가 어느 서당에 들렀다. 그런데 서당 학동들의 이가 모두 빠져있었다. 어느 암자에 사는 중의 소행이었다. 암자 구경을 간 서당 아이들과 글 내기를 해서 생치(生齒)를 뽑았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중의 소행을 괘씸하게 생각해 이튿날 암자에 찾아가 시 짓기 내기를 하였다. 김삿갓이 계속 이기자 중은 몇 개의 생니를 아이들에게 뽑히는 보복(?)을 당했다. 결국 중은 김삿갓과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런 내기를 안 하겠다고 하였다.
'문학동산'을 찾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사진= 조해훈
어쨌건 김삿갓은 1863년(철종 14) 제 집처럼 드나들던 구암마을 창원 정씨(丁氏) 집에서 세상을 버렸다. 정씨 집은 복원돼 있다. 이 집에서 300m가량 떨어진 곳에 ‘똥뫼’라는 곳이 있다. 옛날 길손들이나 주인 없는 시신을 묻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마을 동편에 있어 ‘동뫼’ 또는 ‘똥뫼’라고 불렸다는 말도 있다.
그가 이 마을에서 숨을 거두자 마을 주민들이 똥뫼에 초장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인 익균이 초장되고 3년 후 자기 집 근처인 강원도 영월로 이장했다. 그리하여 현재 강원도 영월 김삿갓면에 그의 묘소와 ‘김삿갓문학관’이 있다.
'삿갓 문학동산' 인근에 김삿갓이 숨을 거둔 창원 정씨 집이 복원돼 있지만 방치된 폐가처럼 잡초가 무성하고 마당 안의 장승도 넘어져 있었다. 사진= 조해훈
김삿갓의 시편들은 경성제국대학 출신인 이응수(李應洙·1909~1964) 씨가 대학생 때부터 김삿갓의 시를 수집해 1939년 『김립시집(金笠詩集』(유길서점)을 출판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삿갓 설화’는 그의 시와 함께 이응수의 『김립시집』에 실린 이후 현재까지 십여 종이 더 나왔으며, 논문과 저서 또한 계속 나오고 있다.
김삿갓이 구암마을 창원 정씨 집에서 숨을 거두자 '똥뫼'라는 무연고 공동묘지에 처음 묻혔던 초분지. 초분된 지 3년 후 그의 둘째 아들이 강원도 영월로 이장했다. 사진= 조해훈
필자는 구암마을 입구에 있는 ‘삿갓 문학동산’과 그가 숨을 거둔 창원 정씨 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보다 삿갓 문학동산에 시비가 더 세워진 것 같았다. 그가 묻혔던 이 마을 초분지도 둘러보았다. 방문객이 별로 없는지 문학동산과 정씨 댁에 잡초가 무성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