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by Gemini

길, 되감기

이 광

한겨울 새벽같이 길을 나선 그대여
찬바람에 눈을 뜨는 어둠의 아늑한 품
여명이 안기는 모습 눈여겨 보았나요

어둠이 제 살갗을 문지르며 지울 동안
그 속살 어루만져 시나브로 환해지는
어기찬 여명의 손길 기억하고 있는가요

밝아오는 길 위에 가득 차오른 빛이
고이 접어 남겨 놓은 어둠이 머문 흔적
뒷골목 한 편의 그늘 잊지 않고 있는가요


젊은 시절 카세트테이프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필자는 카세트의 되감기 기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좋아하던 곡이 끝나면 되감기 버튼을 눌러 다시 감상하곤 했지요. 우리는 가끔 지나온 길도 되감아 보곤 합니다. 길은 카세트테이프처럼 재생이 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되감는 과정을 통해 지나온 삶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순 있지요. 한 해를 보내며 잠시 사색에 잠겨봅니다.

20여 년 주로 새벽 출근을 해온 필자는 겨울철 집을 나선 후 먼동이 트는 장면을 자주 접합니다. 여명이 어둠에 안기는 듯하다가 시나브로 환해지기까지 ‘어기찬 여명의 손길’은 오늘 하루도 부지런히 일하라고 격려하는 모습입니다. 빛과 어둠은 서로 이기려 하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시간대에 따라 맡은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요. 어둠의 시간에도 빛은 있어 길을 밝혀주고 빛의 시간에도 길을 잃고 주저앉은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 속의 빛을 기억하듯이 우리는 ‘뒷골목 한 편의 그늘’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광 시인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당신, 원본인가요》,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