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곳에서
남녀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되는
물권색
物權色
<물권색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저곳의 다섯 공리公理 axiom>
1.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오고 선후배 없이 다 똑같은 동등한 존재다. 존대말 없이 서로 말을 터도 된다.
2. 살아생전에 언제 어디서 살았던 다른 지역에 대해 대충은 안다. 시공간 초월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3. 이승에서의 집착을 다 비워 버려야 하지만 아직 미련이 있다. 물권색 욕망이 강한 인간의 관성 때문이다.
4. 한 방에서 이성끼리 대화하다 방이 바뀌며 이성 상대가 바뀐다. 덕분에 저곳에서의 생기가 은근히 살아난다.
5. 저곳에서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최종 정착지가 정해진다. 그러니 저곳은 중간 경유지가 된다.
47. 경수와 술녀
난 참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어. 첫끗빨이 개끗빨이라고 처음엔 잘 나갔는데 나중엔 배려버렸어. 영광스럽던 삶이 치욕의 삶으로 되어 버렸지. 왜 그랬을까? 살아생전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에 대해 다 남 탓을 했지. 내 주변에 배반자 놈들, 나를 배신한 미국놈들 탓이라고 했지. 내가 부하 군인 놈들한테 총맞아 죽을 때 그 놈들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어. 여기 들어와서도 그놈들에 대한 원망으로 맘이 편치 못했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려가 쳐죽이고 싶더군. 사실 지금도 그 맘이 변한 건 아니야. 그런데 아주 중요하게 변한 맘이 있어. 그 놈들 탓하기 전에 내 탓이 더 크더라구. 그 놈들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든 거더라구. 내가 믿었던 카톨릭교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회개가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야. 그 놈들 네 탓이 10%라면 나로 인한 내 탓은 90%야.
너 경수라고 했나? 경수 철(喆) 났네. 그런데 죽어서 철 났네. 죽어서 철 드는 건 아무 소용없어. 그냥 여기서 위로하는 거지. 뭐! 그래도 죽어서 여기 들어와 철 들었으니 안든 거보단 나아. 나는 살아서 철들었었는데 힘이 없었어. 죽어서 철든 너나 살아서 철들었던 내가 차이가 있지만 나는 그 철이 아무 소용 없었지. 여기 들어와 후회되는 게 있기는 해. 내가 살아서 그렇게 했다면? 뭐 이런 쓸데없는 반성이지. 죽어서 철든 너는 그런 후회와 반성이 더욱 크겠지? 나보다 더 그런 마음과 생각이 클 거 같은데...
술녀, 너 내 마음을 어찌 그렇게 잘 알아. 얼굴은 거칠어도 똑똑하네. 내가 살아서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반대로 했더라면? 난 여기서 늘 그런 거만 생각해. 쓸데없는 거지만 쓸데없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 살아생전의 기억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어. 나의 바보같은 행동들! 나는 어찌 그리 살았을까? 머저리처럼… 아이고! 등신도 그런 등신이 없어. 그러면서 내가 대통령이었다니! 나는 그런 권력을 가질 자격도 소질도 능력도 없었어.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어야 했어. 물론 내가 살던 시대가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때가 아니었기도는 해도. 그렇더라도 내가 멍청한 대통령으로 살았던 거보다 더 잘 살았을 거야. 권력이라는 건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야. 특히 온전한 권력은 더욱 그러하지. 나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온전한 권력자가 아니었어. 대통령이 되면서 나의 알량한 사리사욕만 챙기는 몹쓸 권력자가 되었지. 권력행사도 제대로 못했어. 그냥 내 동생과 제수씨한테 맡기고 나는 그냥 대통령 놀이만 했던 거야. 아! 내가 싫다. 밉다. 난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바보였어. 권력자가 그러면 나쁜 거야. 난 나쁜 놈이었어. 그래도 살아생전엔 그런지도 몰랐어.
그래 여기서라도 실컷 맘껏 후회 반성 회개해. 그래도 세상엔 일 잘하는 온전한 권력자도 많아. 너 살았을 때도 너같지 않은 똑똑한 권력자가 있었을 걸. 너와 전혀 다른 멀쩡한 통치자 말이야.
너 어째 내 맘 속에 들어온 거같네. 내가 여기 들어와 늘 선망(羨望)하는 사람이 있어. 그는 나랑 똑같은 해에 태어났어. 나보다 10년 전에 권력을 잡았고 8년 권력자였던 나보다 14년이나 긴 22년 권력자였지. 그런데 시기나 기한은 중요한 차이가 아니야. 그는 나처럼 초대 대통령으로 죽어서 국부가 되었지만 나는 초대 대통령으로 죽어서 바보가 되었어. 하늘과 땅 차이야. 만일 여기서 그를 만난다면 나는 내 처지가 창피해서 쳐다볼 수도 없을 거야. 나는 왜 그처럼 하지 못했을까? 내가 생각만 바르게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 사람이야.
Sukarno 1901~1970,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나랑 동갑인 이 친구는 62세로 죽은 나보다 7년 더 오래 살았어. 69세에 죽었지. 근데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나는 처음에 안그랬는데 나중에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 양반은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만끽했어.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작품을 만들며 이루며 살았지. 인생품질이 나랑 비교가 안돼.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운동가로, 초대대통령인 정치지도자로 살면서도 수컷 남자로서 할 건 다 하고 살았어. 공식적인 결혼만 7번 했어. 이 점이 나랑 완전히 상반되. 나는 평생 독신 총각으로 살았거든. 나 성적으로 정상적 남자이지만 여자를 일부러 멀리 했어. 왜 그랬나 몰라. 나도 명실상부하게 명색이 남자인데 왜 여자를 싫어했겠어. 게다가 나는 인물도 좋았어. 아울러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까지 있었는데 여자들이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겠어. 그런데도 난 여자들을 물리쳤어. 나는 겉으로 나를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는데 신경썼어. 나는 여자한테 관심없는 고상한 사람처럼 국민들에게 보이도록 했지. 이를 위해 나의 육체적 본능을 거부했던 거야.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리 했어. 아마도 국민들이 처음에 나를 존경했는데 그 존경심을 지키려느리 쓸데없는 강박관념이 작용했던 거 같아. 주변에 여자가 없으니 내 동생의 아내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지.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열 받아.
너 정말 바보 맞네. 네가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하네. 어유!
나 불쌍한 남자 맞아. 그런데 내가 부러워 하는 이 친구는 아주 대놓고 여자를 좋아했어.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여자는 데비라는 여자야. 세 번째 아내지. 58세 때 이 친구가 일본에 국빈방문했었어. 이 때 일본정부가 이 친구를 모시라고 이 여자를 옆에 앉혔지. 일본여자이지만 서구적 미모가 돋보이는 19세 아름다운 아가씨였어. 이 친구는 그냥 이 여자한테 흠뻑 빠지고 말아. 결국 이 여자를 자기네 나라로 오게 해서 결혼까지 하지. 그녀는 데비 수카르노가 되지. 일본제국주의 시절 자기네 나라를 못살게 굴던 일본의 여자가 퍼스트 레이디가 된 거야. 그런데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이를 용인했어. 대통령이 이쁜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걸로 그냥 그렇게 그러려니 그런가보다 하게 여겼나봐.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게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통치를 잘했어. 다섯 개의 원칙인 판차실라라는 국정방향을 설정했어. 지금의 인도네시아 헌법에 있는 거야. 당시에 공산당 세력이 드세게 준동하고 있었는데 수카르노는 노련하게 대처했어. 인도네시안 민족주의와 이슬람교, 공산주의와의 화합을 통치 근간으로 삼았지. 그렇다고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지 않았어. 나는 북쪽의 공산주의 세력을 척결하려고 했어. 끝내 공산세력에게 나라가 넘어갔지만, 그는 공산주의 세력을 적절히 인정하면서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다스렸어. 그래서인가 공산화 되지 않았지. 미‧소 대립 냉전시대의 국제사회에서 그는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비동맹 제3세계의 지도자로 일했지. 물론 그에게 맞서 군사 쿠테타를 일으키고 그를 유폐하며 2대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의 철저한 반공정책 덕분에 그렇기도 했겠지만… 이상적 낭만적 지도자로 평가받는 그는 하타라는 부통령과 함께 인도네시아 화폐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해.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의 국제공항 이름이기도 하지.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 아! 나로서는 꿈도 못꿀 일이지. 인도 중국 미국에 이어 4위의 인구대국이며 세상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그는 아마도 전세계가 하나의 국가인 코스모폴리탄 세계국가가 나올 때 가장 적합한 전세계인 통치자로서의 롤모델일 거야. 나는 그를 질투시기하지않고 존경추앙해. 나랑 갑장이지만…
수카르노라는 사람. 참 불쌍한 네가 부러워할 만하다. 나도 너처럼 부러운 사람이 있어. 아니, 부럽다기보다는 내가 그녀 앞에서 숙연해지는 여자야. 나라는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나는 수동적으로 나의 처지를 비관하며 살았지만, 그녀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키려고 싸웠어. 그야말로 용감한 여자였어. 그녀에 비하면 나는 얌전하게 산 편이지. 물론 흑인 원주민인 그녀의 싸움이 백인 정착민인 영국놈들한테 도저히 이길 수는 없었지. 나보다 12살 언니인 그녀는 나보다 일찍 태어났지만 나보다 훨씬 먼저 운명을 달리했어. 나는 그녀가 죽고나서 45년이나 오래 살았어. 때문인지 덕분인지 나는 호주 남동쪽 아래 태즈매니아섬에 살았던 마지막 원주민이라는 오욕인지 영광인지를 가지게 되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살던 섬에 살던 모든 원주민들은 나를 마지막으로 모두 멸절했다는 뜻이야. 타레노레레, 그녀도 이에 포함되는 거고… 다 영국에서 온 백인놈들한테 죽임을 당한 거야. 그녀는 이에 처절하게 저항한 것이고. 얼굴허연 영국놈들은 우리한테 애보리진(aborigin)이란 이름을 지들 맘대로 붙이더니 우리를 사람취급도 안했어. 그냥 사람 비슷하게 생긴 검은 유인원 동물로 여겼지. 그 놈들이 나를 살려둔 것도 내가 동물인지 인간인지 관찰하기 위함이었어. 죽은 나를 해부하며 박제했지. 내가 살던 섬에 살던 마지막 애보리진으로 영구보관하려는 생물학적 목적이었어. 나는 죽어서도 여기 들어오지 못했어. 박제된 몸으로 이리저리 구천을 맴돌다 죽은지 백년만에 겨우 화장되어 들어왔어. 그런데도 나는 살아생전에 그런 백인놈들한테 저항하지 못했어. 나 살아생전에 그녀를 만난 적이 있기에 그녀처럼 저항한 적이 있기는 했어. 하지만 그건 그냥 저항한 척 한 거에 불과했지.
Tarenorerer 1800~1831, 호주 태즈매니아 플린더스섬 전사(戰士)
너무 너를 자책하지마. 사람은 근본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보다 살려는 의지가 훨씬 더 강해. 싸워서 일찍 죽기보다 적당히 오래살려는 의지가 강한 거지. 그게 정상이야. 그런데 이 여자는 정말 보통이 아니네. 그 드센 백인놈들한테 죽기살기로 싸운 거네.
그녀는 저기 서양 프랑스의 처녀인 잔다르크보다 용감했어. 저기 동양 유관순보다도 강인했지.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것에서 나아가 폭력적으로 투쟁했어. 물론 폭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녀가 백인놈들한테 하도 당해서 폭력 투쟁한 거지. 1800년 생인 그녀는 1820년대 후반 20대 나이에 레지스탕스 원주민을 조직하고 지도하며 투쟁했어. 그냥 무대뽀(無鐵砲)로 싸운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힐 때 배운 백인놈들의 무기 사용법을 통애 나름 전략전술을 세워 싸웠어. 그녀는 백인들의 지배에 맞서 싸운 강력한 여성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지. 용기와 투쟁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잔다르크처럼 기려지고 있지는 않지. 왜냐하면 그녀가 살던 태즈매니아는 물론 본토 대륙인 호주 땅에서도 그녀의 후예들은 명맥이 사라졌다시피 해. 태즈매니아섬에서는 아예 절멸했고 본토에 살아남은 원주민 후예들의 삶은 곤궁해. 그냥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거지. 호주 옆 뉴질랜드에선 마오리 원주민이 백인들과 동등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호주에선 애보리진 원주민이 불쌍하게 살고 있어.
아니 어떻게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원주민들의 삶이 그렇게 다를 수 있지? 신기하네.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좋은 질문이면서 아픈 질문이야. 일단 외모가 달라.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덩치가 백인놈들만큼 커. 생긴 것도 잘 생겼어. 근데 애보리진이라고 칭하던 우리 호주 원주민은 덩치도 작고 좀 생긴 게 좀 검고 거칠며 못생긴 편이야. 그래서 일단 외모에서 무시당하기 쉬웠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전사들처럼 잘 싸우지도 못했어. 그랬는데 그녀는 싸웠어. 아마존 여전사처럼 싸워서 백인놈들한테 타격을 입히기도 했지만 승리하지 못했어. 승리할 수 없었지. 끝내 붙잡혀 감방에 있다가 독감에 걸려 죽었지. 아, 근데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워. 왜 시끄러운지 좀 알아봐.
<전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