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opilot

🍂 대봉감을 따다가 스친 생각

친구 ‘언덕배기’(감 농장)에서 6일간 대봉감을 땄다. 친구는 제날 따서 제날 택배로 보내기 때문에 하루에 많이 따지 않는다. 하여 감 따는 시간은 오전 3시간 정도이다. 점심 후 선별하여 종이박스에 담고, 테이핑해서 택배회사에 보내면 하루 작업 완료, 오후 3시 이전에 끝난다.

4일째에는 부산과 제주 사는 친구의 대학 동기들이 합류했다. 친구의 친구들이나 자주 만나다 보니 넷 모두가 친구 사이가 됐다. 노동 강도가 세지 않고, 작업 시간도 짧다. 그 덕분에 이런 저런 대화를 곁들이는 감 따기 작업이 산행하듯 즐거웠다.

마지막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이제 손에 익을 만하니 끝이구나!” 그 말에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 생장수장의 섭리와 인간의 운명

제법 살아서 이제 ‘사는 게’ 뭔지 좀 알 것 같은데, 이미 깊은 가을에 접어들었다. 자연은 생장수장(生長收藏)한다. 나서, 성장하고, 수확하여 내년을 위해 저장한다. 인류는 생장수장으로 순환하지만, 인간 개인은 나서 자라다 은퇴하고 소멸할 뿐이다.

🔍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

삶(인생)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 없다.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삶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왜 그럴까?

삶을 개인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루하루의 단편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순간은 지나가야만 의미를 드러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결국 삶 전체는 직접 경험이 아니라, 과거의 누적을 통해서만 추론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이해 속에 놓여 있다.

□ 4차원의 시각과 세계선

삶을 전체로 이해하려면 시간까지 포함해 한눈에 볼 수 있는 4차원의 시각이 필요하다. 4차원적 시각에서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드러나며, 인생의 궤적이 하나의 구조로 파악된다. 그러나 4차원적 시각마저도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실현된 ‘세계선’(世界線, World Line)만을 보여줄 뿐,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가능성과 선택의 다양성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세계선은 물리학의 개념이지만, 문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꿰뚫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까지 모두 이어져 있는 궤적이다. 우리는 그 선 전체를 직접 볼 수 없고, 언제나 현재라는 작은 단면만을 살아간다.

그러나 세계선은 마치 영화 필름처럼, 이미 지나간 장면과 앞으로 펼쳐질 장면을 모두 품고 있다. 또 하루하루의 기록이 모여 한 권의 일기장이 되듯, 우리의 삶도 세계선이라는 긴 이야기 속에서 이어진다. 결국 인간은 끝에 다다라서야 전체를 알아볼 수 있는 ‘뒤늦은 깨달음’(hindsight)만 가질 뿐이다.

🌌 5차원 이상의 초월적 관점

그러나 개인의 세계선만으로는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의 궤적은 언제나 타인의 궤적과 교차하며, 그 교차 속에서 의미가 생겨난다. 친구와의 대화, 가족과의 관계, 사회와 역사의 맥락은 모두 나의 세계선에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삶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단일한 세계선이 아니라 수많은 세계선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하는 거대한 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5차원 이상의 초월적 관점이다.

그 관점에서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 인류 전체의 궤적까지 함께 드러난다. 나의 선택이 타인에게 어떤 파장을 남겼는지, 타인의 결정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 모든 인과와 교차가 하나의 구조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이러한 초월적 관점을 신(神)이나 절대적 질서라는 이름으로 상정해 왔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삶을 넘어, 모든 존재의 세계선이 서로 얽혀 있는 거대한 직조물로서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 가을은 쓸쓸함이 아니다

따라서 삶의 의미는 경험이 누적된 늘그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렴풋하나마 손에 잡히게 되어 있다. 과거를 성찰할 뿐 후회할 이유는 없다. 3차원의 인간으로서 4차원이나 5차원에 속하는 일을 언감생심, 애당초 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희미하나마 깨달음이 왔을 때는 어쩜 떠나야 할 때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러한 삶의 속성은 결코 쓸쓸하거나 슬픈 일이 아니다. 손에 익을 만하니 일이 끝나는 것처럼, 인생도 이제야 알 만하면 가을이 깊어져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생장수장의 섭리에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풍을 아름답다고들 한다. 단풍 구경 나들이도 한다. 단풍 구경 나들이에 나선다. 그러나 나무에게 단풍은 단지 생존을 위한 선택일 뿐이다. 잎을 물들이고 떨어뜨리는 것은 겨울을 견디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그러나 그 떨어지는 잎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게 무슨 잘못이랴, 마는, 나무가 애쓰는 생존의 몸부림도 단풍과 같이 눈에 들어올 때, 가을은 쓸쓸함이 아니라 성숙함이 되리라.

조송원 작가

<작가/본지 편집위원>